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설립해 평생 대화운동에 앞장섰던 고 강원용 목사, 지금 탄신 백주년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와 고 강원용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다.<편집자>
경동교회, 북간도출신 기독학생들로 시작
◇ 권혁률> 채목사님 반갑습니다.
◆ 채수일> 네. 반갑습니다. 오래간만입니다.
◇ 권혁률> 경동교회 부임하신지 얼마 되셨습니까?
◆ 채수일> 작년 1월 말이니깐, 글쎄요. 한 15개월 됐나 봐요.
◇ 권혁률> 신학자에서 목회자로 변신하셨는데 어떠십니까?
◆ 채수일> 재밌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학교에 있는 것보다 바쁜 것은 엄청나게 많이 바빠요. 그런데 신학을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공부하는 거구나. 설교의 준비도 그렇고, 심방도 그렇고 해서 목회가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굉장히 기쁘고 행복합니다.
◇ 권혁률> 경동교회하면 강원용 목사님이 떠오르는데요. 해방 후에 기독학생들하고 같이 교회를 시작하신 거죠?
◆ 채수일> 네. 1945년 12월 2일에 첫째 주에 저희 경동교회가 창립을 했는데요. 사실은 해방 직후 북간도에서 공부하던 학생과 선생, 우리 김재준 목사님, 강원용 목사님 당시 북간도에서 은진중학교 학생이었죠. 그때 그런 분들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선린형제단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만들었어요. 그것이 경동교회의 모체라고 할 수 있겠죠. 선린, 그러니깐 좋은 이웃, 또 선한 이웃이 되자라는 뜻에서 모인 신앙공동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권혁률> 그 당시 기독학생들과 강 목사님께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 채수일> 선린형제단이 아주 구체적으로 강령을 정하고 신앙 운동을 했는데 복음화, 선교 이런 것도 있지만 특별히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 건설을 하자, 그것이 아마 가장 큰 꿈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야학을 하거나 굉장히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또 아주 구체적으로 해방 정국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민하고 기도했던 청년들이었는데 그 후에 바로 이 청년들이 나중에 4‧19세대가 되고 60년대, 70년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되었죠.
◇ 권혁률> 강 목사님의 대표적인 사회 활동이 크리스챤아카데미죠. 어떤 활동이었습니까.
양극화 해소위한 대화 운동 시작
◆ 채수일> 크리스챤아카데미는 1960년대 독일 크리스챤아카데미의 모형을 한국에 들여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제가 알기로는 독일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뮬러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크리스챤아카데미 운동을 배우고 그것을 한국교회 안에서 상당히 구체화하려고 했던 노력이었는데 60년대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개발, 소위 근대화 조금 더 나아가면 개발 독재 하에서의 근대화의 길을 걷는 과정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양극화가 아닌가. 도시와 농촌 또 계층간의 양극화, 이 양극화를 대화를 통해서 해결을 해야지 않느냐.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러면 누가 그 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하느냐. 그것을 소위 중간 집단이라고 했어요. 이 중간 집단이라고 하는 단어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기회주의적인,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런 오해를 단어 때문에 받았지만 중간 집단이 지향하려고 했던 목적은 농촌, 산업사회, 교회사회, 여성사회 이 네 개의 큰 사회 영역 안에서 이런 양극화를 극복하고 비인간화되는 한국사회를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그 어떤 강한 주체의식을 가진 어떤 세력, 이것을 중간 집단이라고 부르고 중간 집단 교육을 통해서 지도력을 양성해왔죠.
그것이 가장 큰 결실을, 대부분의 영역에서 그랬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농촌사회가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 것은 한국의 농촌사회 민주화 운동에 그루터기가 인물들을 길러내는데 크리스천아카데미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 권혁률> 저도 강 목사님 생전에 대화 모임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지금이야말로 대화 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는데요. 어떻습니까.
서로 다름 인정하고 열린 대화하는 것이 중요
◆ 채수일> 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 특별히 우리 한국사회는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죠. 남북, 심지어는 동서, 그 오래된 남북과 동서간의 갈등과 분열도 문제지만 계층간, 계급간, 흙수저‧금수저 논란도 있고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하여튼 우리 사회가 자꾸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진보와 보수, 태극기와 촛불, 중요한 것은 이런 갈등을 해소하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이자 동시에 목표가 저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크리스챤아카데미의 로고가 사실은 장구에요. 장구인데 이어령 선생이 디자인을 했다고 하는데 장구는 양면의 가죽이 다르고 또 양면의 지름이 다르죠. 그리고 약간 틀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크기도 다르고 가죽도 다르고 또 균형도 잡히지 않았지만 이 장구가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대화도 입장이 다르고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열린 대화를 통해서 가장 합리적인 어떤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 대화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화가 수단화돼서 자기를 오히려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상대를 조금 개종시키려고 하는 방식으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대화, 상호존중과 열린 마음에서 진행되는 대화는, 대화만이 정말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어쨌든 최선의 방식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 권혁률> 그런 대화 운동의 정신을 지금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요.
◆ 채수일> 대화 자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대화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문제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한 테이블에, 라운드테이블에 모이게 하는 것이 매주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는, 그 확고한 신념의... 뭐라고 할까요. 고집, 뭐 이런 것 때문이 아니라 많은 경우 진영 논리 때문에 이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저는 우리 한국사회를 보다 대화적인 사회로 만드는데는 크리스찬아카데미가 70년대 60년대 한 것처럼, 오늘은 사실은 한국교회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대화사회 실현에 앞장서야
물론 진보적인 신학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기, 또 그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옛날에도 중요했고 앞으로도 중요한 과제겠죠.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당파적인 논리에 싸이면 객관성이나 또 합리성을 많이 상실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그런 믿음으로 세워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당파성이나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또 사람을 대화로 인도할 수 있는 기구라면 기구고 공동체라면 공동체 아니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정말 한국사회 자체의 성숙한 미래를 위해서도 스스로 대화의 능력을 갖춰야 할뿐 아니라 한국사회를 대화적인 사회로 만드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률> 정말 대화 운동이 다시금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 채수일> 네. 그렇습니다.
◇ 권혁률> 지금 강 목사님 100주년 행사 다양하게 준비하고 계시죠?
◆ 채수일> 100주년, 작년에는 서거 10주년이었습니다. 올해는 탄생 100주년인데요. 대화문화아카데미, 재단법인 '여해와함께'에서는 세 권의 평전을 냈습니다. 사회 운동가로서의 여해 강원용, 또 언론인으로서의 여해 강원용, 또 목회자로서의 여해 강원용 목사에 대한 세 권의 평전이 출간되었고 또 강 목사님에 대한 기초자료를 모은 아카이브도 한 권 출간했고 주목할 것은 여해와함께 재단에서 여해상을 제정했어요.
그럼 여해상을 누구에게 수여할 것인지, 위원회가 심사과정에서 몽양여운형선생님기념사업회에 드리자. 그렇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목양선생님이 남북간의 분단과 전쟁과정, 전쟁의 위험 속에서 남북 합작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좌우건 혹은 진영논리가 아닌 민중의 미래를 위해서 합작을 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희생당하시기도 했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드렸고요. 특별상으로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세우고 유지해오는데 많은 도움을 준 노베르트 한스 클라인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또 우리 교회는 교회적으로 음악회도 하고 목사님을 기리는 영상 자료도 만들어서 회상하고 그랬죠.
◇ 권혁률> 그렇게 기념사업을 진행하시면서 이 시대에 정말 강 목사님의 정신을 되살리신다면 어떻게 해야되겠다, 그런 고민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 채수일> 네. 강 목사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평가는 사람마다 마땅히 달라야하죠. 또 다를 수밖에 없겠죠.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고 그런데 우선 긍정적인 면에서 평가하면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정신이 있다면 저는 우선 그 분의 호라고 생각해요. 여해, 바다같은 뜻이잖아요.
그런데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그것을 주셨다고 그래요. 사람에게 대게 호를 줄 때는 그가 그런 사람이니깐 주는 경우도 있고 그가 그렇지 못하니깐 그러라고 주는 그것도 있는데. 강 목사님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가 이미 바다 같은 넓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셨는지, 아니면 바다같은 사람이 되라고 주셨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가 살아온 흔적을 보면 예를 들면,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공부하고 싶어서 일찍이 집을 떠나거나 간도에서 공부하고 험난한 삶을 보면 나중에 역사가 인물을 만든다고, 커진 분이라기보다는 아니 본래 상당히 크신 분이었지 않나.
우리가 지금 한국교회를 보면 물론 큰 인물이 나타나거나 기대되는 상황이 꼭 좋은 시절은 아니죠.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꼭 있어야하는 시대, 민주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지금의 한국교회, 한국의 신학교도 마찬가지지만 소위 큰 사람이 없다. 갈등을 중재하고 방향을 잃은 한국교회나 사회에 방향을 제시하고 그래서 안 믿는 사람에게서 조차도 존경을 받는 그런 큰 인물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죠. 그래서 그런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보단 스스로 그런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는, 해야 한다. 그게 하나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아야 할 전승하고 우리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국정자문위 참여, DJ 구명위해서였다지만 가슴아픈 일
◇ 권혁률> 조금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강 목사님께서 독재정권과 타협한 것이 아닌가 이런 비판도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채수일> 저도 아카데미의 간사였거든요. 저는 청년사회 간사였는데 사실 아카데미가 그 당시 간사들이 전원 체포되고 저는 다행이지만 그때 군대에 가 있었거든요. 근데 이 간사들이 모여가지고 일본 서적을 가지고 불온서적을 가지고 공부했다하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은 60년대부터 해오던 아카데미 운동, 특히 그 중간 집단 교육 운동이 정부의 눈에 거슬렸겠죠. 그래서 소위 아카데미 사건이 커지게 됐고 목사님 자신도 그때 끌려가서 상당한 조사도 받고 그러셨죠.
그래서 나중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을 했다, 이런 평이 있고 그러나 왜 그분이 자문위 위원이 되었는지 또 어떤 배경이 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팩트는 광주 민중의 희생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들어선 신군부의 정권에 자문위 위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마도 개인적으로 목사님 자신의 명예나 역사에도 과오인 것만은 분명하죠.
저도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제가 군에 있을 때 그 기사를 보고 목사님께 쫒아가서 여쭸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그랬더니 제가 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목사님이 안 하려고 여러 차례 사양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당시 김대중 선생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사형을 해야 한다는 상당히 포악한 분위기 속에서 그건 막아야 되지 않겠나, 최소한의 그런 역할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런 뜻에서 머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뭐, 개인적으로 들은 이야기뿐이고 여러 사람들이 그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을 하겠지만 누구보다도 목사님 자신이, 우리 옆에 계시진 않지만 가장 가슴 아픈 일로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권혁률> 강 목사님께서는 평생 교회에 대한 관심, 사회에 대한 관심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계셨는데 요즘 한국교회 지도자분들이 보면 사회에 대한 별로 없고 교회에 대한 관심만 크신 것 아닌가하는 이런 지적도 나오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 채수일> 옛날에도 사실은 교회는 아주 본질적으로 보수적입니다. 그거 뭐 우리가 신학적으로 약간 개방적이고 자유적인 신학을 수용한 교회는 진보적이라고 그러고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적인 신학을 수용한 교회는 보수적이라고 하죠. 현안에 대한 에이즈 문제나 동성애 문제나 여성사제 문제 등 현안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서 보수‧진보 이렇게 대개 나누지요.
그런데 60년대부터 교회가 양분되어 있고 한기총과 NCC로 나눠져 있고 그런데 지금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사실은 시대마다 진폭이 있었죠.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예를 들어 김대중, YS정권 이후부터는 교회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노동 단체라든지 정부가 그런 갈등을 수용하고 해소해 온 노력도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안 줘도 되게끔하는, 그게 오히려 진보쪽이 세상,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게 된 배경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강 목사님이 복음과 세계, 하나님나라와 국가 등 다리를 놓으려고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다리를 놓으려고 했던 노력에 대해서는 아마 개인적으로 김재준 목사님의 영향일 수도 있고 또 그분이 그 이후에 세계교회협의회나 세계종교인평화회의 이런 활동을 통해서 아주 체득화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분의 신학적 신념 때문에 그것이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었죠.
그것이 오늘날의 경동교회를 보면 아시죠. 경동교회가 규모에 있어서는 그렇게 큰 교회는 아니죠. 그러나 예를 들어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자, 그러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예언자적인 발언도 하고 또 그런 방향을 제시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강 목사님의 영향인데 오늘 그러면 한국교회 다수는 왜 그럴까?
세상의 현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이 너무 복잡해지고 전문화됐다는 거죠. 교회가 제시하는 어떤 대답이나 대안이 현실 분석 능력이나 교회가 거기에 기초해서 내놓는 대안이라는 것이 얼마나 현실 적합적이고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조금 저는 비관적, 아니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약하다. 그리고 세계가 이미 우리의 능력을 훨씬 뛰어 넘는 수많은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고 사람, 조직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의 대사회적 발언이 그렇게, 뭐라고 할까요. 그렇게 확대되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보여요.
그러니까 이제 큰 틀에서 인권이라든지, 지구의 미래, 환경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적인 경제 시스템, 사회 시스템, 이런 것들을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하게 가야한다는 원칙적인, 이제 아주 구체적으로 에너지 정책이 그래야 하고 이런 것은, 그래서 전문가들하고 끊임없는 대화를 하면서 해야 하는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안 하거나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 권혁률> 교회가 이제 전문화된 세상에서 세부적인 내용보다는 인간을 이해하고 물질주의에서 벗어나는 큰 방향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갖고 이끌어나가야 된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 중에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서 대화하자,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주어진 큰 숙제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채수일> 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