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포르노'의 평등을 꿈꾼다

[로포리 프로젝트가 남긴 것 ①] 남성과 이별한 '로망 포르노'

일본 '로망 포르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빨간 머리의 여자' 포스터. (사진=자료사진)
'포르노'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성적(性的) 행위를 묘사한 소설, 영화, 사진, 그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그러나 1970~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일본 닛카츠 영화사의 '로망 포르노'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당시에도 넘쳐났던 자극적인 '포르노들'과 '로망 포르노'의 차이점은 '성'이라는 소재로 무엇을, 어떻게 추구했느냐에서 시작된다. '포르노들'이 남녀 간의 성애 묘사에만 집중했다면 '로망 포르노'는 이를 넘어 세계를 확장해나갔다.

닛카츠 영화사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감독들은 의무적인 성애 장면을 제외하면 그 외 부분에서는 자유로운 창작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무한한 '성적' 상상력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사회 문제들을 녹여낸 영화들이 탄생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링' 시리즈의 나카타 히데오 감독 등 일본 영화계를 이끈 감독들 또한 '로망 포르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직접 성관계를 하는 장면 없이도 영화는 관객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시각뿐만 아니라 감성까지도 충족하는 마케팅이었기 때문이다. 닛카츠 영화사의 작업은 기존 '포르노'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포르노'가 단순히 욕구 배출의 도구가 아니라 영화적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디오 시장과 함께 AV(성인 비디오물·Adult Video의 약자)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로망 포르노'는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1988년을 마지막으로 '로망 포르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포스터. (사진=오렌지옐로우하임 제공)
◇ '로망 포르노', 28년 만의 귀환

그로부터 29년이 흘렀다. 닛카츠 영화사는 지난해 다시 한 번 '로망 포르노'의 부활을 선언했다. 일명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줄여서 '로포리 프로젝트'다.

'부활'은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닛카츠 영화사는 '포르노'가 탄생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관행을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바로 영화 전반에 짙게 깔려 있는 남성 중심 시각이다. '여성들까지 즐길 수 있는 포르노는 만들 수 없을까'라는 다분히 실험적인 발상에서 비롯됐다.

이 작업이 '실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포르노'가 이성애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즐기는 남성은 많지만, 여성들에게 '포르노'는 도무지 마음 놓고 즐기기 어려운 콘텐츠다. 간단하다. '포르노' 속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기보다는 성적 도구로 왜곡된다. '포르노' 세계에서는 여성의 반항조차 흥을 돋우기 위한 소재로 여겨진다. 남성들에게는 쾌락일 수 있지만 여성들에게는 다분히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로포리 프로젝트'를 한국에 선보인 차병길 PD는 "과거 '로망 포르노'의 남성 로망은
강간에 치우쳐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조금 달랐던 것은 강간 피해자인
여성이 복수를 하거나 미래를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전개들이 '로망 포르노'를 '뻔하지 않은' 포르노로 만들어 낸 비결이었다. 사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닛카츠 영화사는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며 트렌드를 선도해왔다. '로망 포르노' 뿐만 아니라 액션물부터 청춘물까지 다양한 장르 영화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래서 '로망 포르노' 제작 당시 닛카츠 영화사에 있던 감독들 역시 '포르노' 전문 감독이 아니었다.

차 PD는 "닛카츠 영화사에 있던 감독들은 고학력자들이 많았다. 원래 포르노 영화를 만들던 감독들도 아니다. '포르노'를 찍더라도 의식을 담자는 그들의 생각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된 거다. 물론, 지금 보면 결국 강간은 남성들의 '로망'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로포리 프로젝트' 영화 중 하나인 소노 시온 감독의 '안티포르노' 포스터. (사진=오렌지옐로우하임 제공)
◇ '로망 포르노'가 '페로티시즘'을 만나면?

최근 페미니즘 논의가 확장되면서 생긴 신조어가 있다. '페미니즘'과 '에로티시즘'을 합친 '페로티시즘'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에로티시즘을 뜻한다.

'로포리 프로젝트'에 속한 '안티포르노'(소노 시온 감독), '바람에 젖은 여자'(시오타 아키히코 감독),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암고양이들'(시라이시 카즈야 감독), '화이트 릴리'(나카다 히데오 감독) 등 다섯 편의 영화들은 이성애와 남성 중심에서 벗어난 '페로티시즘'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애초 닛카츠 영화사에서는 온전히 여성의 관점을 구현하기 위해 여성 감독들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 감독들이 쉽게 구해지지 않아, 감독들은 남성으로 가되 여성 PD나 작가를 기용해 공동 작업을 추진했다.

물론, 모든 결과물이 완전히 남성 시각에서 탈피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작품에서는 여성의 신체나 성애 장면이 지나치게 환상적으로 묘사돼 '리부트'의 의미를 다소 느끼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여성들은 '야릇한 성적 도구'가 아닌 '주체적인 인격체'로 존재하고 있다. '로망 포르노'의 계보를 잇는 후속작답게 영화들은 남성의 억압을 배척하거나 풍자를 통해 고발한다.

차병길 PD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여성들도 충분히 '포르노' 영화를 향유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이야기했다.

5월부터 3주에 한 편씩 개봉 중인 '로포리 프로젝트' 영화 중 '바람에 젖은 여자'는 이미 온라인에서 다운로드 서비스가 진행되고 있다. 보통 포르노 영화들은 남성과 여성
구매자 비율이 9대 1이나 8대 2에 머물지만 이 작품은 여성 구매자 비율이 46%를 기록했다.

차 PD는 "아직 여성들에게 '포르노'는 익숙하지 않은 장르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포르노'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여성을 향한 왜곡된 성적 대상화를 벗어난다면 포르노도 충분히 양지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이제 '로포리 프로젝트' 2회차를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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