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반대 피고인 변호하다 기독교 신앙 갖게돼"

[CBS초대석]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 방송 : CBS초대석 (CBS TV : 6월16일(금) 아침 7시 30분, 17일(토) 밤 11시 10분, 19일(월) 저녁 7시, 21일(수) 저녁 8시 10분)
■ 다시보기 : CBS TV 어플리케이션->초대석
■ 진행 : 조혜진 기자
■ 대담 : 한승헌 변호사 (서울시정고문단 대표)


◇조/ 한승헌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 한/안녕하세요.

◇조 /저희가 와 있는 이곳이요, 서울시청인데요. 서울시정고문단 대표를 맡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통합정부추진위원회 자문위원단장'도 맡고 계시잖아요. 지금 새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국민들의 기대가 굉장히 높습니다. 지지율도 계속 올라가고 있구요, 이런 기대에 대해서 변호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한/지금 문재인 정부 탄생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촛불민심으로부터 시작해서 합헌적인 절차과정을 걸쳐서 대통령선거까지 평화적으로 마친, 이건 세계정치사에서 유래가 없는 정부탄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당선 후에 대통령께서 하시는 걸 보면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건 이런거구나. 그리고 종래의 권위적인 대통령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들이 국민들이 또 호감을 갖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모든 선거를 하면 사실은 기성복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것이 선거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뽑힌 기성복은 어쩌면 이 시대나 우리 마음에 맞는 맞춤복을 우리가 대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런 마음이 앞으로 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잘해줬으면 좋겠어요.

◇조 /맞습니다. 그 말씀에 공감이 가네요. 선거할 때는 그 중에서 가장 괜찮은 기성복을 골랐는데 뽑고 보니까 맞춤복같이 딱 맞더라. 정말 끝까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가는 대통령이 되기를 저도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변호사님께서 쓰고 계신 호가 ‘산민’이에요. 뫼 ‘산’(山)자에 백성 ‘민’(民)자 쓰고 계시죠?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아요.

◈ 한/ 제가 60년대 말에 인사동 통문관 2층에 있는 검여(劍如) 서실에 다니면서 검여 유희강 선생님한테서 서예를 배웠습니다. 그때 저한테 내려주신 아호가 산민인데 산민이란 아호를 내리시면서 희열을 저한테 주셨어요. 거기 보면 한승헌 선생 근재산민(近在山民)이라. 산민, 소박한 백성 요즘으로 말하면 소외받는 사람. 민중들 가까이 항상 있을지어다. 이런 뜻으로 해서 저한테 산민 아호를 주신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저한테 부담이 되고 내가 그 아호에 합당한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의 길을 가야겠다는 그런 마음이 들어서 저에겐 아주 엄숙한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조/ 그 호대로 살아오셨던 것 같아요. 군사독재 시절에 양심수, 시국사범들 주로 변호를 많이 하셨고요, 많은 사건들 있었죠?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대통령 긴급조치 1호 4호 등등 이런 사건들, 그러니깐 별로 안 맡고 싶어 하는 좀 불편해하는 사건들만 주로 많이 맡으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어요?

◈ 한/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극에 달해서 거기에 대한 저항, 그 저항을 또 억누르는 탄압, 이게 이제 나쁜 의미로 상승작용을 해서 그 결과로써 시국사범, 소위 양심수, 이런 억울하게 핍박당하고 심지어 사법처리까지 당하는 사람이 많이 생깁니다. 그때 변호사가 필요한 건데 아무래도 정부가 미워하는 사람을 변호하면 변호하는 사람도 역시 미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조금은 변호를 꺼려한다고 할까? 하여튼 나서는 분이 좀 많지 않을 때였어요. 근데 그런 때 나라도 좀 아는 척을 하고 돌봐주자 하는 생각으로 한 건 두 건 변호를 맡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만 그 분야에 마침 전문변호사처럼 그렇게 됐고 그것이 저의 행로라고 할까? 운명에 여러 가지 파문을 미쳤죠.

◇조/ 그럼 “이제 나라도 맡아야 겠다.”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는데, 그런 사건들과 첫 번째 인연은 어떤 사건으로 연결이 됐어요?

◈ 한/제가 검사생활 5년하고 나서 정말 자유롭게 살겠다는 일념으로 변호사가 됐습니다. 1965년인데요, 그때 제가 아는 남정현이라는 작가가 ‘분지’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게 ‘반미용공’이다 해가지고 구속되고 사건화가 됐어요. 그 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이 이른바 시국사건 변호의 맨 첫 출발이라고 할까? 그때는 이런 사건 한 두 번 하면 그냥 끝나겠지 했는데 그 후에 일어난 정치적인 탄압사건을 보면 꼭 제가 아는 분만 아니라 제가 그때 문담, 언론계, 이런 쪽에 아는 분들이 있어서 일이 있으면 쫓아다니는데 제가 알지 못하는 제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또 외면하는 건 또 조금 양심의 가책이 되니까 그건 그거대로 내가 잘 변호해야지 하고 열심히 뛰었죠. 그러다보니까 일반사건은 오히려 수임이 안 되고 시국사건에만 몰입하게 되는, 그런 생활이 1~2년이 아니고 10년 20년 이렇게 됐습니다.

◇조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요, 승률이 어느 정도 나왔을지?

◈ 한/승률이라는 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민사에서는 원고 또는 피고니까 승패가 승소하는 게 이기는 건데 형사에서 승률이라는 것은 죄 없는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될만한 사람이 석방이 되고 이런 재판 결과를 이끌어내면 그걸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한국의 60년대 이후의 법원 판결의 성향을 보면 억울한 사람은 유죄가 되고 풀려날 사람이 계속 징역을 사는... 이런 일반적인 풍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변호할 때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무죄를 확신하고 변호를 지금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유죄 판결이 날 것이라는 것도 확신해야 되는 이런 모순에 빠져있다”. 나는 무죄라고 확신했는데 판결은 항상 유죄가 되니까. 아까 말씀하신 승률로 친다면 저는 늘 패전이었죠. 그러나 정말 패배 속에서 어떤 승리를 감지하고 그 승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성경에도 그런 말씀 있습니다만 당시 시국사건 변호하는 사람들의 하나의 신념이었고 장기적으로 보면 역시 ‘내가 이긴 거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74년 봄에 나온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대량 검거했던 민청학련 사건.. 그게 이제 긴급조치 1호만 가지고 진압이 안 되니까 긴급조치 4호를 만들어서 민청학련을 때려잡는 그런 폭거를 하는데 그때에 검거된 사람만 해도 1204명 이런 통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군법회의에 기소된 사람만도 180명입니다. 이게 군법회의라는 하나의 요식행위 같은 절차를 거쳐서 판결이 나는데 그 민청학련 사건에서 여덟 명이나 사형수가 나오고 또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사건 거기에서 또 사형수가 그만큼 나옵니다. 나머지는 무기10년, 군 검찰관이 구형하면 그냥 거의 그대로 판결이 떨어지는 이런 일이 참 식은 죽 먹듯이 벌어져서 그때 제가 한 말이 그겁니다. 검찰관 구형대로 판결이 다 그렇게 나면 이건 ‘정찰제’ 아니냐. 한 푼도 안 깎아주니까... 그래서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에서 상도의로써 확립된 게 아니고 삼각지 군법의 판결로써 정찰제가 확립됐다.’ 이런 말을 제가 변론을 한 적이 있어요. 특히 그 사건에서 잊을 수 없는 건 민청학련 배후로 날조된 인혁당 사건에 사형수 8분이 대법원 판결 확정 난 다음날 처형됐다는 사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또 가슴 아픈 건 처형된 중에 한 사람인 임정남군이 경북대학교 학생회장 출신인데 제가 담당했던 피고인입니다. 근데 4월 9일날 처형하는 그 시간에 변호인이던 저도 반공법으로 구속이 돼서 같은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었어요. 그날 저녁에 형 집행하는 줄도 모르고 자고난 뒤에 보니까 그런 처참한 참 야만적인 형 집행이 있어서 이래저래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훗날에 가서 그게 재심에서 무죄가 됐습니다마는 살아있는 사람의 경우 무죄 그러면 하다못해 복권도 되고 명예회복도 됐다고 하지만 이미 목숨을 잃은 그렇게 가신 분들의 영혼은 다시 살아오는 건 아니고.. 그니까 그게 아주 독재의 범죄, 사형제도의 폐단, 이런 걸 절실히 느끼게 됐죠.

같이 옥살이하는 목사님들, 장로님들, 또 기독청년들 이렇게 얽혀 지내면서 기독교인으로써 저만큼 자기 모든 걸 던지고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서 헌신한다면 그 신앙 참 좋은 거구나. 라는 생각을 제 체험을 통해서 하게 됐죠. 나중에 저도 참 신앙으로는 미진하지만 입술로만 하나님, 하나님 하지 말고 실천으로써, 행동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크리스천의 올바른 길이다 이런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됐죠.

◇조 /그럼 그때 박형규 목사님에 대한 변호를 하시다가 신앙을 갖게 되셨단 말씀이세요?

◈ 한/남산부활절 사건 이후에 1974년에 긴급조치1호 유신헌법 반대를 정면으로 내놓고 그런 사건의 피고인에는 젊은 목사님, 전도사님, 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피고인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었어요. 그걸 변호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당하고만 있고 침묵하거나 오히려 그쪽에 붙어서 사는데 크리스천은 왜 그럴까 라는 걸 조금씩 생각하게 되고 그 뒤에 이런저런 연고라든가 사정이 겹쳐서 제가 마침내 교회 나가게 되죠. 그래서 저는 그런 걸 계기로 해서 내가 신앙도 갖게 되고 이 세상에서 의의를 구현하겠다고 저만큼 헌신적으로 하는 사람들하고 내가 알게 되고 저보다 나이도 드시고 훌륭한 분들도 알게 되니까 저한테는 하나의 축복이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보통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그러는데 내 체험을 보면 변호사는 피고인을 잘 만나야 되겠더라고. 내가 피고인을 잘 만나서 그나마도 우매한 것을 조금 덜어내고 얼마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시는 대로 1987년 4월쯤 되면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씨한테 그냥 지들끼리 의견 주고받듯이 모든 권리를 넘겨주려고, 다시 말해서 대통령 후계를 전두환씨가 노태우에게 주려고 하는 그런 일이 있을 때 6월 항쟁이 벌어진 거죠. 6월 항쟁에서 우리가 그만한 성취를 이루었던 것은요, 그때까지의 데모세력, 종교인 아니면 노동자 일부 양심세력이 있었는데 거기에 플러스 종래의 반정부적인 시위에 냉담했거나 외면했던 세력들이 많이 참가합니다. 중소상공인, 교사, 뭐 의료인, 심지어 대구경북의 치과의사들도 전부 성명을 내고 그야말로 범국민적인 투쟁으로 그것이 힘을 모았던 거죠. 그래서 어쨌든 6.29선언이 나오고 대통령직선제, 직선제 후에 여러 가지 권력다툼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러나 6월 항쟁은 정말로 큰 의미가 있는 그런 우리의 싸움의 성과였다고 생각하고요. 그냥 여담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그 때에 종래 데모세력 아닌 쪽에서 먼저 참여한 것이 의료계, 그 중에 대구 경북 쪽의 치과의사들이 성명을 내고 참여를 했어요. 저는 그때 민주헌법정치국민운동본부 약칭 국본의 상임공동대표의 한 사람이었는데 ‘왜 치과의사들이 먼저 나서서 했을까?’란 얘기가 있을 때 제가 평가모임을 겸한 예배에서 그랬어요. “치과의사들이 먼저 나선 것은 그분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를 갈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먼저 나선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모두 박수를 치더라고. 이를 갈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돼요.

◇조/ 정말 힘든 시기를 말씀을 하시는데도 변호사님이 유머를 잘 섞어서 말씀해주셔서, 원래 성격이 좀 재밌는 분이세요. 변호사님?

◈ 한/특별히 그렇게 생각은 하지 않는데요, 유머라는 것이 기쁘고 좋은 일에서 하하 웃는 것은 그냥 웃음일 수도 있지만 유머는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아주 그늘지고 아프고 힘들 때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기 위안으로, 아니면 세상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한마디씩 나오면 그게 유머라고 불리는 아주 좋은 언어수단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너무 엄숙하고 틀에 박힌 말이 수학이나 순열조합, 말의 순서만 바꿔가면서 끼워놓고 그 소리가 그 소리 이런 데에 익숙해 있는데 조금 영역을 넓히고 말에 색깔을 좀 달리 다채롭게 했으면 좋겠어요.

◈시 낭송 [한승헌 시집-하얀 목소리]

하얀 종말 곁에
마주 보던 목숨이여!

또 오셨군요,
할 수 없지요,
혈액원 앞뜰에서 인사를 하던
한 젊은이가 쓰러지는
서울의 정오 뉴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만가였다.

저만치 보이다가 침몰해버린
파도 속의 얼굴
지워진 내 이름의 자리
지금은 누가 있는가.

미운 자들의 웃음소리에도
귀먹은 유월은 그저 푸르구나.
여기 미친 자들의 공간
몸살을 하다하다
꽃잎은 진다

혼자만의 물줄기 가눌 길 없는
초여름 긴 하루의 종착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한
헛걸음이 끝나는 자리에서
당신은 그렇게 쓰러져갔다.

누구 안에도 내가 머물지 못하듯
내 안에 이제 아무도 없다
아쉽고 착한 것은 으레
먼저 떠난다.

또 오셨군요,
할 수 없지요,


슬픈 산하에 잠기는 하얀 목소리
오늘 나는 부끄러운 조객인 것을…

◇조 /시로써, 유머로써, 그 힘든 엄혹한 시절의 아픔을 좀 순화시켜볼까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막 다가오는데요, 그런데 그런 힘들게 살아가시는 남편, 아버지를 봤을 때 가족들도 같이 좀 마음이 힘들지 않았을까, 아프지 않았을까, 우리 아버지 왜 이렇게 고생할까. 그랬을 것 같아요.

◈ 한/제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고생과 걱정이 많았죠. 보통 법조인들, 변호사의 가정 그러면 흔히 말하는 대로 조금 유복하게 살 수도 있고 근심 걱정 없이 이렇게 산다든가 하는데 저는 좀 험한 말로 하면 변호사 하면서 사고만 치고 자꾸 미행당하고 도청당하고 끌려 다니고 징역가고 그러다보니까 식구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는데 감사한 것은 제 집사람과 아들이 괜히 그렇게 고생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만드느냐’ 란 불평을 한다든가, ‘그러지 말라’든가 이런 말이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힘드니까 제가 도중에 주저앉거나 달라질까봐서 그걸 경계하는 그런 은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세상에 떳떳하고 거창한 걸 말하기 전에 내 가족 앞에 우리 처자식 앞에 떳떳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절실하더라고요. 매일매일 집에 들어갈 때 내가 정말 떳떳한가, 라는 걸 반성하게 되고... 그러니까 참 가족이란 게 저에게 큰 후원자였죠.

◇조 /그러니까 아버님이 걸어가신 길이 가시밭 길이었다는 걸 다 알고 있어요. 자제분들이. 그러면서도 굉장히 존경스러운거죠.

◈ 한/글쎄요,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 시대에 조금만 생각 있는 사람은 모두 다 가시밭길을 걸은 거고, 저 혼자만 유별나게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더 처참한 일을 많이 당하고 심지어 참 목숨까지 잃은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평생을 망쳤다면 표현이 나쁘지만 그렇게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짜부러진 그런 수난을 감수하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희생 위에서 그나마 이 나라가 이 만큼의 민주주의 터전을 지탱해왔다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조 /그 길에 변호사님도 함께 하셨고요.

◈ 한/뭐, 함께 했다기 보단 변호사니까 원래는 변호사는 그 2선에서 움직여야 하는데 어쩌다보니까 2선이 1선으로, 축구로 말하면 후방의 수비인데 어쩌다보니까 저 공격수가 돼서 상대방 골문 앞에 가서 막 부딪혔던 이런 삶을 살아온 거죠.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

(문재인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면 1975년 봄에 제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을 때에 한 달쯤 뒤에 경희대학생 문재인 군이 데모현장에서 붙들려 와서 제 옆방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그때는 누군지 몰랐지만. 그래서 제가 선반 위에 비치되어있던 내의 한 벌을 교도관 통해서 전해줬어요. 시위 현장에서 붙들려서 경찰서 통해서 오니까 더워지는 날씨에 얼마나 더러워지고.. 그래서 내의를 준 것이 인연이 있습니다. 그러고 이제 나중에는 부산에 노무현 변호사가 또 지역이 어려운 가운데서 많은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 하니까 연계가 되고 노무현 변호사 재판 받을 때 서울에서 변호사들이 많이 응원 차 변호인으로서 참여를 하고 나서 2004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해서 그때 헌법재판소에 재판이 걸렸을 때 변호인단으로 참여해달라고 했을 때 제가 12사람 변호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법정에 나갔고... 제가 조금 군번이 빠르니까 앞에 나가서 앉아서 이러저러한 거 조금 소송을 했죠. 그런 걸로 해서 많이 서로 인연이 깊어졌다고 할까.. 그렇습니다.

◇조/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분이세요?

◈ 한/법조인치고는 퍽 사람냄새가 난다. 또 말하는데 보면 진실성이 있어 보이고 그 다음에 참 겸손해요. 지금 여러분들 언론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만, 거짓으로 그런 게 없고 진실한 사람이고. 또 이번에 대선과정에서 확인됐지만 왜 그렇게 명석하고 아는 게 많고 표현력이 호소력이라고 할까? 설득력이 대단하더라고요. 그게 이제 지도자가 갖춰야할 소통능력하고 관계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큰 장점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제발 지금과 같은 국민들의 박수로 갈채를 계속 받는 지도자로서 남아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 /아마 모든 국민들의 똑같은 바람이 아닐까 싶어요. 끝까지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대통령으로 남아주기를 말이죠.

◈ 한 /그렇게 되기를 저도 바랍니다.

◇조/ 이제 끝 질문을 드려야 될 것 같은데요, 지난해에 쓰셨죠?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라는 책을 펴내셨는데요, 정말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셨어요.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가야한다고 보십니까?

◈ 한/원래 그 책은 이름 그대로 <재판으로 본 현대사>니까 현대사에 의미가 있고 문제 된 사건들이 재판에서는 어떻게 다뤄졌던가 판결 보면서, 동시에 그 재판이 진실을 은폐하는 그런 수단으로써 이용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숨겨진 진실을 바로 밝혀내는 그런 진실의 장으로써의 재판이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봤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을 통해서 재판을 보고, 재판을 통해서 사건을 보는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근현대사 역사서가 많이 있는데 사건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법정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어떤 진실이 오갔는가를 중심으로 쓴 책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마침 법조인이니까 그거 한번 써볼까..했는데 난 법조인으로서 법정 안팎에서 이루어진 그런 잘잘못에 대해서 내가 역사 앞에 모든 경험과 진실을 밝히겠다, 하고 그 전에 선언한 바가 있어요. 그런데 보면 너무 금방금방 모두 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러죠.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건, 이 책을 내는 것은 국민들의 망각방지를 위해서 내가 쓴다.” 이렇게 하는데. 왜냐하면 어제 일, 과거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은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미래를 잘못 요리하는 큰 화근이 되거든요. 그래서 단군 고구려까지 잘 알면 더 좋지만 그냥 사극으로만 봐도 되고 현재 역사에 직결된 그런 현대사에 대한 많은 관심을 좀 가져주셨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조/ 현대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우리가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에 대해서 늘 기억을 하자 이런 말씀이세요?

◈ 한 /그렇습니다.

◇조 /제가 변호사님이랑 얘기를 나누면서요, 저는 크리스천의 역할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봤던 것 같아요. 정말 그 엄혹한 시절 안에서도 바른 목소리를 목숨 걸고 냈던 크리스천들이 있었고, 그분들에 의해서 사회가 조금씩 바뀌어나갔고, 또 그분들에 의해서 변호사님도 신앙을 갖게 되셨구요. 그 모습이 지금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되찾아야 할 그럴 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변호사님 앞으로 더 건강하시고요. 우리 사회가 좀 더 사회 정의가 바로 서는 데 있어서 정말 어른으로써 든든한 역할을 끝까지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 한 /감사합니다. 이제 그러면 좋은데 제가 이제 80대 중반에 접어들거든요. 얼마 전에 구청보건소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보니까 치매 테스트를 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와서, 내가 이렇게 됐나 하고 놀랐습니다. 아직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으니까 이것이 허용되는 한 뭔가 내 임무를 다해야된다, 하는 이런 생각은 접지는 않고 있습니다.

◇조 그 유머감각 잃지 말아 주시구요. 저희도 같이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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