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직의 업무상 기밀이 비공식적인 통로로 외부에 유출되는 수준까지 허용되는 것은 결코 안됩니다. 업무시간 이외에는 공정위 OB들이나 로펌의 변호사 등 이해 관계자들과 접촉하는 일은 최대한 자제해 주십시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사 맨 마지막에서 강조한 당부의 말이자 경고이다.
김상조 위원장는 공정위 등 정부 부처가 '로비꾼들의 사냥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2003년 경부터 소액주주 운동을 하면서 대기업, 즉 재벌 지배체제 개혁운동을 해왔다. 그를 압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시작부터 삼성합병 건(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물고 늘어졌다. 국민연금공단이 삼성합병을 찬성하는 대가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재단과 승마 지원이 이뤄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야심차게 청구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뇌물혐의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되고 말았다.
특검은 특급 소방수가 필요했다. 긴급 소방수로 불려 온 이가 바로 김상조 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의 조언은 특검의 새로운 수사전략을 짜는데 밑그림이 됐다.
"이런 말씀 드리면 조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특검에 도착해서 제가 담당 검사한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검사님, 제가 먼저 얘기를 할게요라고 하면서…"
"그래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의 특징 또는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작업의 어떤 과정들. 그리고 최근에 언론에 보도되었던 여러 가지 사안들, 즉 물산 합병이나 또는 순환출자 해소 문제, 바이오로직스 상장 문제 금융지주회사 전환 문제 이런 것에 대한 저의 의견들을 먼저 말씀을 드렸고요. 그리고 이제 특검이 저희들이 낸 보고서 같은 것들을 보면서 궁금했던 점을 또 질문하고 답하는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됐었습니다"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2월 17일 출연-
특검은 새 수사전략에 따라 박근혜 정부와 삼성간 유착을 삼성 합병만 '단건'으로 보지 않고 더 연속적인 과정으로 조밀하게 들여다 봤다. 삼성 합병이 시작된 2015년 6월부터 금융위원회를 상대로 한 삼성생명 금융지주사 설립 추진이 이뤄진 2016년 4월 총선 직전까지다. 그 사이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간 독대가 2차례 있었다.
특히 특검은 삼성 합병과 금융지주사 설립 추진이 이뤄지는 중간 시점(2015년 10월)에 이뤄진 삼성합병에 따른 공정위의 순환출자 고리 해소문제를 현미경 보듯 훑었다.
삼성은 부인하지만 합병과 순환출자고리 해소, 그리고 금융지주사 설립(실패로 드러남) 등 '3개의 기둥'은 이 부회장 경영승계에 절대적 조건임이 재판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 부회장은 결국 구속됐다. 특검은 박근혜 정부와 삼성의 결탁은 "정경유착의 고리"라고 못박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특정 개별 대기업과 정권의 유착이 수사를 통해 '실체적 사실'로 적나라하게 파악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혹자들은 "특검의 삼성 수사가 '해부'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김 위원장 경고는 당연히 예견된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건데요. 대통령이 올바른 어떤 지시만 내린다면 우리나라 공무원들 잘할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 정경유착에 의해서 잘못된 지시가 내려갔던 게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 국정농단 수사에서 드러난 '짝궁형 맞춤 로비'
서울중앙지검 특수 1부는 최근 김학현 전 공정위 부원장에 대한 위증죄 수사를 시작했다. 특검은 김 전 부위원장이 이 부회장 공판에서 '거짓 진술'을 했다며 위증죄로 고발했다.
그런데 위증죄 수사를 형사부가 아닌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서 담당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취임하지 않았다면 좀체 가능하지 않은 수사다.
특검과 검찰 특별수사본부(특수본)는 공정위가 삼성합병에 따른 순환출자 고리 해소문제를 다루면서 '1000만주→ 9백만주→ 5백만주'로 처분 물량을 축소시키는데 김 전 부위원장이 핵심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공정위는 위원장 결재로 1천만주 처분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김 전 부위원장이 삼성미래전략실 김종중 사장과 만찬 회동을 갖고 난 다음 돌연 5백만주로 축소했다.
특검 관계자는 "김 전 부원장을 대표적인 공정위내 '삼성맨'"이라고 말했다.
"그를 고발한 건 단순히 위증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2015년 11월 17일 김종중 사장에게 밥을 얻어 먹고 그 모임이 계기가 돼 위원장까지 결재가 난 정책결정을 바꾸게 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공정위 부원장이 외부 식당에서 미전실 사장을 만나 부탁을 받은 게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공직자 윤리 의식도 갖지 못한다면 큰 문제이다. 검찰 수사를 통해 그날 모임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검 관계자-"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공정위를 향한 삼성의 촘촘한 로비 구조는 마치 거미줄과 똑같다. 과장과 사무관은 삼성 미전실의 상무와 부장이 마크(담당)하고 국장은 전무급, 부위원장은 사장이나 부사장 급이 담당한다.
즉 부처(공정위) 과장,사무관 ↔삼성 상무·부장, 국장↔ 전무, 부위원장↔ 사장으로 이뤄지는 '짝꿍형 맞춤 구조'이다. 이 구조는 연속적이고 장기적이다. 예를들면 과장.사무관이었을때 친분은 승급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연속적으로 승계되는 구조다.
로비의 사슬 구조는 '공정위 대 삼성 매칭'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 로펌이나 삼성 고문으로 영입된 부처 출신 OB멤버들이 총동원 된다.
재판에서 김학현 전 부원장은 공정위 출신인 서동원 김앤장 고문으로부터 전화를 여러차례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서 고문은 김 전 부원장과 경기고,서울대,경제기획원과 공정위 선후배 관계이다. 김앤장은 삼성의 법률자문을 빙자해 부처 OB인맥들을 동원해 '대관 로비'를 보충해주는 것이다.
임민호 청와대 행정관(공정위 파견)도 김앤장 OB들의 로비 대상이었다. 임 행정관은 재판에서 "삼성합병과 관련 공정위 OB들이 왜 증인(임민호)을 만나려 했습니까"라는 물음에 "실무자인 저한테 얘기하면 아무래도 부드럽지 않았을까요"라고 대답했다.
이같은 로비 구조는 공정위만이 아니다. 금융위원회도 또 하나의 대표적 대기업 지배구조 규제기관이다.
역시 '증인'으로 출석한 손병두 금융위 전 금융정책국장은 "(금융위에서 삼성생명 금융지주회사 전환 추진이 지연되자) 삼성 미전실 전무가 전화와서 '윗분(이재용 부회장)'의 의지가 강한 것 같다. 안종범 수석에게도 (삼성이)별도로 설명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증언했다.
'고공 로비'부터 '실무자 로비'까지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김 위원장이 "직원들이 전문성과 자율성에 근거해 내린 판단은 일관되게 실행할 수 있도록 외풍을 막아주겠다"고 밝힌 것은 이런 맥락 때문이다. 갑자기 로비를 받은 부위원장이 일방적으로 정책 결정을 중간에서 뒤바꾸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취임 당일 김 위원장에게 직접 물었다.
기자 -작정하시고 OB나 이해 관계자 만남을 자제하라고 요청한 듯 한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 위원장 -제가 이제 막 취임해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좀 더 다른 간부들과 얘기를 나눠보고 다듬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니다.지금은 개인 의견 차원에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저도 좀 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전체 시스템상에서 의견을 들어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