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국내에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을 때도 '국익' 이야기가 꼬리표처럼 따라나왔다. 사드는 '북핵 방어용'이라는 명분까지 있었다. 용도와 효용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거치기도 전에, (파면 당하기 전의) 박근혜 정부는 이 무기를 어디에 배치할지부터 궁리했다.
정부가 낙점한 곳은 바로 경북 성주군이었다. 2016년 7월 국방부는 성주군에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제3부지설이 나오다 9월 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위치한 성주골프장으로 확정됐다. 어찌됐건, '성주'였다.
다큐멘터리 '파란나비효과'(감독 박문칠)는 '사드 가고 평화 오라'며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군민들의 투쟁을 담은 작품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건강을 염려해 반대 목소리를 냈던 이들이, '사드'가 각국 외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큰 문제라는 것을 차츰 깨닫고 "한반도 어디에도 사드를 둘 곳은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 엄마들이 주축이 되어 3달 넘게 이어진 싸움의 시간이 펼쳐지지만, 영화는 무겁고 딱딱하지 않다. 사드 배치가 확정되고 나서야 언론의 교묘한 프레임과 의도를 깨닫고, 다른 아픔과 곤경을 겪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평범한 여성들의 모습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어떤 단체 소속도 아니고, 당연히 '운동'이라고 할 만한 걸 해 본 적이 없는 데다, '새누리당이라 익숙해서 1번을 찍었'던 사람들. 영화가 흘러갈수록 그들은 '변한다'.
혈서까지 쓰면서 '사드 배치 결사 반대'를 부르짖던 성주군수가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성들을 비하하고 촛불을 방해하자, '인간 띠 잇기'를 하고 길바닥에 앉아 문화제를 벌이며 맞선다. 지난해 7월 성주에서 처음 시작됐던 '촛불'은 338일째인 오늘(15일)도 켜질 예정이다.
◇ '유명인'이 없는 신선함
박문칠 감독은 "지난 여름부터 있었던 성주에서의 이야기들이 언론에서는 '똑같은 현수막과 똑같은 구호를 외치는 군중'으로만 나타났다. 사실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영화 촬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갈등'의 현장에 으레 한두 명의 유명인이 있는 것과 달리, '파란나비효과'에는 그런 인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유명인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는 진입장벽이 높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옆집 살 것 같은 '우리네 이웃'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박 감독은 "잘 안 드러나는 부분을 드러내고 싶었다"며 "300일 넘게 매일 촛불을 들고 계신다. 누가 시켜서 하면 안 하지 않을까. 기존 사회운동, 정치운동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성주는 그렇지 않아서 더 새로운 모습이었다. 관객들도 신선하게 느끼고 새로운 고민을 안고 가셨으면 해서 그런 부분을 부각했다"고 말했다.
◇ 성주군민들이 말하는 '나의 변화'
배정하 씨는 "저희 아버지가 유림이시다. 아버지가 대선 때 박근혜를 찍으라고 해서 '독재자의 딸을 찍으면 안 된다'고 했다가 귓방망이를 맞을 뻔했다. 그런데 사드 문제가 터지고 저희가 (반대 운동에) 앞장서니 (아버지가 자신의) 손가락을 분질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선에서도 차마 1번은 찍지 못했는데 5번을 찍으셨다"고 전했다.
이어, "가부장적인 분이신데 인생에서 두 번째로 여성 대통령 후보를 찍으신 거였다. 될 사람을 뽑은 게 아니라 되었으면 좋겠다는 후보를 뽑았다는 걸 듣고 그날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배은하 씨는 "투쟁 나간다고 했을 때 저희 신랑은 '정부가 하는 일은 못 막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저를 지지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제가 지치자 '너는 이제 좀 쉬고 있어라' 하며 자기가 나가더라. 딸이 세 명인데 우리 막내딸에게까지 의식 변화가 왔다"고 말했다.
배미영 씨는 언론을 바로 보는 법'을 배웠다. 배미영 씨는 "언론사들이 저희를 비쳐줄 때 프레임에 자꾸 가두려는 시도들이 많이 보였다. 그 프레임을 깨려고 더 노력했다. '나 여기서 계속 살았는데 외부세력이래요~ 종북 빨갱이래요' 하면서"라고 말했다.
이어, "SNS 중독이 올 지경이다. 페북 뉴스 검색하고 사드 관련 새로운 기사 읽어보고 하면서 이 기사가 어떤 관점으로, 어떤 의도로 써진 기사인지 선별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정말 건강한 의식을 갖고 투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수미 씨는 과거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나 '국익'을 앞세워 지역을 탄압했던 제주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마을 등에 무관심했던 자신의 사례를 언급하며 '의식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수미 씨는 "성주에 직접 오셨더라면 군사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아셨을 것이다. 주민들을 다 감금시켰고 어르신들은 비 맞으면서 통곡하셨다"며 "저는 국민의식의 변화가 곧 혁명이라고 본다.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의식 자체가 바뀌면 더 큰 힘이 일어나지 않을까. 저 같이 몰상식했던 사람도 바뀌는 이야기를 그린 거니 많은 분들이 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투쟁은 즐겁게, 신나게, 질기게, 건강하게
왜 필요한지, 실효가 있는지, 뒤따르는 피해와 부작용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주민들이 강력히 반대하는데도 대다수 대선 후보들은 이 문제를 숙고하지 않았다. 자신의 안보관을 과시하기 위해 찬반 여부를 따져묻는 정도 후보 몇몇이 도드라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성주군민들은 촛불을 든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는 슬로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배미영 씨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즐겁게 해야 된다는 쪽이었다. 하루이틀 만에 끝날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서 '투쟁은 즐겁게, 투쟁은 신나게, 투쟁은 질기게, 투쟁은 건강하게' 네 가지 구호를 매일 외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면 이 투쟁이 즐겁고도 견고하게 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 같다"며 "이제 영화라는 최신식 무기가 생겨서 정말 열심히 홍보하러 다니고 있다"고 밝혔다.
배은하 씨는 "처음 투쟁 나왔을 때도 아이들을 위해 나왔고 지금도 그 마음 변치 않고 있다. (성주의 자유한국당)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지고 있고, 촛불에 나왔던 아이들의 변화에 감동을 느끼며, 성주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을 했다"며 "파란나비가 훨훨 날아 성주를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게 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배정하 씨는 대구 시사회 당시 보고 나면 화나고 짜증나서 다큐를 잘 안 봤는데 '파란나비효과'를 보고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고 말한 학생의 사연을 소개한 후 "파란나비효과를 보고 (그분처럼) 많이 느끼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파란나비효과'는 오는 22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