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불법 내몰고, 차별 숨기고…"무기계약직='가짜'정규직" ② '왕궁 수문장'도 '철도 지킴이'도 전부 비정규직 ③ "2분 늦었다고 해고" 정규직 '0' 악마의 공장 ④ 숨은 '사용자', 은폐된 '비정규직'…"실태부터 드러내라" ⑤ "대통령이 우릴 구할 수 있을까"…무대로 나오는 비정규직 |
기아차 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모닝과 레이를 생산하는 충청남도 서산의 동희오토 공장. 이 곳에는 주야 맞 교대로, 생산라인에는 항상 600명 넘는 노동자가 붙어있다. 식사시간을 빼고 하루 20시간 돌아가는 이 공장에서는, 시간 당 무려 56대의 차가 생산된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 공시 자료에서는 해당 회사가 아예 검색이 안 된다. 고용형태공시제는 상시 300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업주가 매년 근로자의 고용형태를 공시토록 함으로써, 정규직 채용을 독려하는 제도다.
◇ 천 명 넘는 노동자를 '유령'으로 만드는 고용형태공시제
이 공장이 노출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시 기준인 ‘300인 이상 근로자’가 정규직만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무직 170여 명을 제외하고 생산라인 1천300여 명 ‘전부’를 비정규직으로 채워 넣은 동희오토 같은 회사는 공시 의무가 아예 없다. 정규직 채용에 대한 압박에서 그만큼 자유롭단 얘기다.
심지어 생산라인의 비정규직들은 원청인 기아차, 하청업체인 동희오토를 거쳐 18개에 이르는 재하청업체 소속이다. 노동자들은 각 재하청업체에 1년 계약직으로 입사해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직으로 신분이 바뀌지만, 업체 사장이 바뀌면 신입사원이 된다. 고용불안에 떨어야 하는 처지지만 ‘정규직 채용을 독려 한다’는 정부의 제도는 이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심인호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은 “정부의 공시 제도가 엄연하게 운영되고 있지만, 우리 공장에서 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은 유령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정규직을 늘리는 기업이 있다고 해도, 공시를 통한 기업의 고용구조 노출을 피하기 위해 정규직 규모를 299명으로 제한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중소기업은 일찌감치 제외하고, 대기업도 정규직 300명 이상을 고용해야 공시의무가 생기는 고용형태공시제가 비정규직 문제의 반은커녕, 반의 반도 드러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우리 노동시장의 고용형태 현황을 점검해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제도의 취지가 무색하다.
◇ 사용자는 숨고, 비정규직 규모는 은폐되고…맥 빠진 제도들
비정규직의 전체 규모 역시 비슷한 사정이다. 통계청이 노사정위원회가 정한 기준으로 지난 해 추산한 비정규직 노동자 규모는 644만 명, 전체 근로자의 32.8%다. 53%라는 노동계의 주장과 무려 20%나 차이난다. 협력업체가 고용한 사내도급 노동자와 골프장 캐디, 학습지 교사 같은 특수고용직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회색지대가 있는 셈인데, 이들이 결국 최종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등 업무가 철저히 예속돼 있다는 점에서 '개인사업자'로 분류할 수 없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당장 스스로 업무를 계획하고 시간을 조절하는 골프장 캐디를 상상할 수 있을까.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은 "어떻게든 숨으려고 하는 사용자를 드러내고 비정규직 규모를 실태 그대로 보여주는 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출발"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정부가 노동부지침으로 고용형태공시제의 한계를 개선하고 통계청의 비정규직 기준을 바꾸면 된다.
이를 통해 일반임시직에 기간제, 상용파트, 호출, 파견, 용역까지 비정규직을 다양하게 분화시켜 책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진짜 사용자’가 누군지, 그 피해자로서 비정규직은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히 드러낼 수 있다. "기아사장부터 동희오토 사장, 18명에 이르는 재하청 사장까지 수 많은 사장을 모시지만, 노동권을 협상할 때는 누구도 자신을 실제 사장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동희오토 조합원)"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