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영화에 투자? 회사 문 닫는다더라"

[노컷 인터뷰 ①] 이창재 감독의 '노무현입니다' 파란만장 탄생기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연출한 이창재 감독. (사진=필앤플랜 제공)
수많은 대작들 사이에서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화가 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가 그 주인공이다.

누구도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150만 관객을 돌파해 열풍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미 정권이 바뀐 시점이었고, 대통령 경선 과정만을 다룬 저예산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이다. 연출을 도맡은 이창재 감독은 그저 8주기에 맞춰 어떻게든 영화를 개봉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많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대부분 투자한 분들이 개인이라 손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었고, 제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도 10만 정도 들면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아예 이런 경험 자체가 없습니다. 이 흥행이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체감 상 바쁘긴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창재 감독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바로 직전, 경선 후보였던 시절을 선택한 것일까. 만약 당시 경선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성공 사례'를 만들지 못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민들의 결집을 뗏목 삼아 거친 바닷길을 건너 대통령 후보라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2000년 총선에서 부산을 선택한 노무현의 이야기가 '무현, 두 도시 이야기'였잖아요. 그리고 2년이 지난 새천년민주당 경선 이야기가 바로 우리 다큐멘터리죠. 노무현 대통령의 삶 중에 왜 이 시기를 선택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이겁니다. 당시 노무현에게는 계파가 없었어요. 그런데 프로 정치인이 아닌 아마추어 시민들이 뒤에 있었죠. 중간 단계 없이 시민과 그 시민이 뽑은 대표, 두 팀의 앙상블이 성공을 이뤄낸 거예요. 순수하게 시민과 시민의 대표자가 만나는 대의정치의 모델, 시민의 힘, 이런 것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영화 '노무현입니다' 스틸컷)
한국은 지금까지도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강한 나라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던 15년 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에는 민주당 내 계파가 더 뚜렷했던 때다. 정치에서는 경선 전에 이미 승자가 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어떤 동력으로 모든 법칙을 거슬러 '태풍' 같았던 '노풍'을 일으켰는지 궁금증이 몰려온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지역을 통합하겠다'는 너무 원론적인 이야긴데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거죠. 어쨌든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원론과 원칙에 따라 살아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구현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살아온 삶 자체로 자기 증명이 가능했어요. '노풍'은 정치판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현실 왜곡이었습니다. 직접 시민들이 저 사람이 좋으니 모여서 한 번 대통령으로 키워보자고 나섰던 거예요. 시민들이 본 건,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이었어요. 계파가 없으니 직접적인 소통과 정치가 가능했던 거고요."

대한민국이 한창 '노풍'으로 들썩댈 무렵, 그는 해외에 머물고 있었다. 나중에 국내에 들어왔을 때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정서가 만연했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며 자신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운전사'. 그것이 이창재 감독이 노무현에게 쏟아냈던 비판 중 하나다.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 보낸 후, 이 감독에게는 당시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당시에는 언론도 막혀 있고, 납득할 만한 소통의 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셨을 때 미안함이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광화문 노제에 갔죠. 만장을 다는 깃대가 PVC(염화비닐수지) 막대인 것을 보며 화가 났어요. 원래 대나무로 해야 되는 건데 죽창으로 바뀌어서 경찰을 공격할거라고 금지시켰다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조문객들이 폭도로 바뀐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최소한의 예의가 있는 건데 그걸 망치는지 너무 서글펐어요. 국민들이 만든 분향소가 있는데도 못 들어가게 경찰 버스로 막아버리고 그랬으니까요."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가시돋친 말을 건넸는데 떠나니 살아 있는 그가 그리워졌다. 이 감독은 노제에서 만났던 '삼성맨' 친구를 기억한다. 그런 곳에 올 것 같지 않았던 친구는 근무 중에 강남인 회사에서 광화문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왔다.

(사진=영화 '노무현입니다' 스틸컷)
영화 말미,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환호하는 국민들의 행렬은 갑자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렬로 전환된다.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 보낸 경험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트라우마로 남았다. 보잘 것 없는 후보를 대통령까지 만든 것도 국민이었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 한 이들도 국민이었고, 또 지금까지 눈물을 흘리는 이들 역시 국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상실감이 큰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 분의 죽음이 제게는 갑작스러운 충격처럼 왔어요. 그걸 설명하지 않고 바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환호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렇게 갔다는 거죠. 당신을 채 알기도 전에, 당신을 보냈다. 당신을 알아가려 하는 시점에 바로 단절됐으니까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을 수밖에 없었어요. 묵혀가는 느낌이 계속 있었는데 그런 게 커져가서 씨앗이 맺혔달까요. 위안을 삼고 싶어서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울어도 해소가 안되더라고요. 이럴 시간에 만드는 게 낫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사실 '노무현입니다'는 지난 2014년 쯤 제작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도저히 투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런 영화를 찍느냐, 그냥 하던 거 하시라'고 말리는 투자사부터 '이거 하면 저희 문 닫는다'는 투자사까지. 외면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변호인' 이후에 영화인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요. 물론 저는 없었지만요. 총 맞을 것 같으면 도망가거든요. 박근혜 정권 중반기에 추진해보려고 했는데 투자사들이 하나같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하더라고요. 아무래도 문화 쪽으로 압제가 빠르게, 구체적으로, 은밀하게 왔던 것 같아요. 전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후퇴했고, 지난해 쯤 총선에서 국민들이 바뀌었으니 숨 쉴 구멍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제작을 시작하게 됐죠."

개봉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함께 의기투합한 최낙용 PD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야 했다. 최낙용 PD가 운영하는 아트하우스 모모에서만 개봉을 하거나, 온라인 배급하는 경우까지 감안했단다.

"목표는 무조건 8주기에 맞춰 개봉하는 거였어요. 배급이 어렵다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두개관을 다 열겠다고 하시겠다고요. 또 안되면 온라인에도 뿌리고 그러려고 했죠. 사실 대선 전에 개봉할까 생각도 했는데 선거법 부분에서 문제될 여지도 있을 것 같아서 8주기로 정했습니다. '김 다 빠졌는데 무슨 노무현이냐' 해도 그건 그거고, 그냥 우리 식대로 애도하기로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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