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라마 현장이라면 익숙한 이상윤에게도 '귓속말' 작업은 유독 난관이 많았다. 그는 극중에서 항상 소신있게 판결을 내리는 판사 이동준 역을 맡아 열연했다. 정의로운 길을 따라 살아온 이동준은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냥 다른 느낌의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처음에 선택을 하고, 자기 선택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변해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거든요. 또 '펀치'의 박경수 작가님 작품이잖아요."
장르 드라마 특성 상, 캐릭터가 주도권을 잡으면 대사 또한 많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대사 실수를 좀처럼 안하는 배우들까지 NG를 많이 냈다고. 대본 일정이 여유롭지 않아 이상윤은 대사를 숙지 하지 못해 촬영 순서를 미룬 적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대사 많은 거 걸리면 백이면 백 다 꼬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설명이나 밀어붙이는 식의 대사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그날 진짜 혼나는 거죠. 저 같은 경우는 생각한 연기가 있었는데 감독님이 다른 연기를 지시하면서 대사까지 전부 숙지가 안 된 상황이라 마음이 좀 꼬인 적도 있었어요. 다음 날, 대본을 보려고 했는데 잠깐 눈 붙이고 있다가 까맣게 잠들어서 양해를 구해 뒷순서로 촬영한 적도 있고요."
근 1년 간 이상윤은 쉴틈없이 달렸다. 지난해 드라마 '공항가는 길'이 끝나자마자 예능프로그램 '버저비터'에 출연했고, 또 '귓속말' 촬영이 이어졌다.
"육체적인 체력 자체는 괜찮았어요. 그런데 촬영할 때마다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컸거든요. 전작도 그랬는데 사이에 쉬지를 못하고 바로 작품을 연달아 하게 되면서 누적된 피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모든 순간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이상윤의 연기를 두고 유독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은 작품이었다. '캐스팅이 잘못됐다'는 뼈 아픈 평가를 듣기도 했다.
"아무래도 연기를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프죠. 캐릭터랑 잘 안 어울린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고요. 사실 그럴 때 스스로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많이 아파요. 하지만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박경수 작가님 전작의
다른 배우들은 힘이 있었는데 제가 약한 모습이라 욕을 먹었다고 봐요. 극 중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 있었어요."
"저는 대충 훑어보고 영향 안 받으려고 하는데 현장에서는 꼼꼼하게 보셨어요. (이)보영 누나도 보다가 중간 중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원래 누나가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또 제가 주도권을 잡고 반격을 했을 때는 좋다고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씁쓸해요. 그냥 저라는 배우의 연기가 별로였다가 좋아졌다는 건지, 극 중 상황에서 몰리는게 싫었다 풀리니까 좋아진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박경수 작가의 대본은 배우들까지도 '큰 그림'을 보고 호흡해야 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 대본을 처음 접해본 이상윤에게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캐릭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해 나갔다.
"박경수 작가님 작품의 특징은 큰 이야기가 먼저 흘러가고, 거기에 인물이 개입하는 점이에요. 저는 동준이라는 인물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보는데, 전체 이야기 크기가 달랐어요. 동준 입장을 연기하고 그 부분을 합해놓으니까 균형이 맞지 않더라고요. (이)보영 누나도 그랬어요. 상황은 큰데 캐릭터 반응이 작은 것 같다고. 촬영할 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결과물을 보니 다른 거죠. 정말 새로운 경험이고 큰 공부였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회 첫 등장 장면에서 이명우 PD는 이상윤에게 동준과 대법관이 강한 신경전을 벌였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상윤은 너무 처음부터 강하게 시작하는 것 같다는 우려가 있었고, 평이한 모습을 연기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감독님이 1회 첫 등장부터 그런 주문을 할 때는 너무 불필요한 느낌을 주려고 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었어요. 보통 드라마에서는 처음에 편하게 가다가 점점 인물 감정이 고조되는 식이니까요. 처음부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는데 완성되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겠더라고요. 앞으로 연기 생활을 해나갈 때 큰 도움이 되는 작품이었어요."
그렇다보니 배우들과 연출진들 사이에 토의가 계속됐다. 이상윤에게 박경수 작가의 대본은 배우보다는 '시청자' 중심의 대본이었다. 배우가 알아야 할 사전 정보를 챙기면서 하나씩 촬영을 해나갔다.
"박경수 작가님의 대본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대본이에요. 사실 배우들 입장에서는 배역에 대한 정보가 중요해요. 어떤 정보를 받았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그걸 통해서 계속 다음으로 어떻게 나갈지 고민하는 거니까요. 사실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또 의식하지 못한 채로 흘러가요. 그런 점에서는 또 쉽죠. 정보가 필요한 지점이 있어서 그걸로 토의를 많이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