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세종문화회관 앞 시위 계기 학생운동 투신
- 1979년 ‘산천초목’ 사건으로 구속
- 31일 간 감금돼 취조, 고문 받아
- 목숨 걸고 민주주의 첫 단추 끼웠던 청춘들, 기억해 주길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7년 5월 22일 (월)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서명숙 이사장(제주 올레)
◇ 정관용> 제주 올레의 서명숙 이사장 오랜만에 오늘 스튜디오에 초대했는데요. 자서전격인 책을 펴냈는데 자기 얘기보다는 어떤 선배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제목이 영초언니라고 하는 그런 제목의 책입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게 영초언니라는 책을 펴낸 계기가 최순실 때문이라고 그래요. 그게 너무 궁금해서 제가 스튜디오에 모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명숙 이사장 어서 오십시오.
◆ 서명숙>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정관용> 영초언니, 성함이 천영초씨죠?
◆ 서명숙> 네, 실명이에요. 천영초고요. 고려대학교 72학번 신문방송학과 선배고 저보다 4년 선배였죠. 고대의 전설 같았던 여자예요.
◇ 정관용> 고대 뿐만 아니라 70년대 운동권에 다 알려진 분이죠. 우선 궁금증부터 풀어봅시다. 그러니까 70년대 서명숙 이사장도 학생운동을 하셨고 천영초 선배가 아마 운동권으로 이끈 선배일 것 같고.
◆ 서명숙> 그렇죠.
◇ 정관용> 그 스토리를 써야겠다, 이건데 최순실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그게?
◆ 서명숙> 최순실 씨가 특검에 출두하면서 죄수복을 그때 입었어요. 수의 입고 딱 이 특검은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이렇게 외치는데 저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아니, 저 여자의 입에서 민주주의를 들어야 하다니. 그런 데다가 딱 영초언니의 그때 법정에 출두하면서 언니도 민주주의 만세 이렇게 외쳤다가 교도관한테 입을 콱 틀어 막혔었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는 입도 안 틀어막혀요.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고 민주주의를 농단하고 법과 제도를 다 농단하고 비선으로 압력하면서 온 나라를 주물럭거렸던 여자 입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정말 튀어나와서 민주주의를 모독하는 그런.
◇ 정관용> 그래서 그 뒤에 염병하네라는 소리를 들었잖아요.
◆ 서명숙> 그래서 저는 그 염병하네라는 심정으로 20대 때 꽃다운 나이에 그 40여 년 전에 바로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말 민주주의가 말살됐던 시절을 내가 보여주마. 정말 민주주의가 없다라는 것은 어떤 상황인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게 어떤 상황인지를 내가 보여주마. 마무리 지어야겠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정관용>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려면 이런 사람 정도는 돼야 한다. 최순실 너는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된다,그 말이군요.
◆ 서명숙> 네. 영초언니라는 정말 민주주의를 거론할 수 있는 사람을,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던 사람을 내 기록을 마무리지으마. 그리고 지금 최순실이나 박근혜 씨가 사는 수감되어 있는 감방의 환경이라는 게 교도 행정의 발전으로 지금 엄청나게 좋아졌잖아요. 그때 어떤 환경이었는지도 또한 보여주마. 진짜 감옥이라는 게 어떤지 보여주마,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 정관용> 이 책은 진짜 박 전 대통령하고 최순실 씨가 읽어야 되겠네요.
◆ 서명숙> 출판사에서 보낸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최순실 씨가 얘기했잖아요. 책 보고 싶다고. 그래서 이 책만큼은 꼭 보여주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 정관용> 주인공 천영초 씨. 어떤 분인지 간략히 소개해 주시면.
◆ 서명숙> 원래 고향은 광주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오래, 서울에서 살다시피했고요. 제가 갔을 때 영초언니가 저랑 같이 동시대에 같은 캠퍼스에 있을 수 없는 학번이었어요. 이미 졸업해서 농민 신문사를 잠깐 다니다가 다시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고 신학에,민중신학에 굉장히 경도돼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이 언니가 한신대학원에 진학을 해요. 그때 제가 만난 거죠. 저는 고대에 재학 중인데 고대 신문사라는 서로 고리가 있었어요. 그분은 전직 동인, 고대 신문사 출신이고 저는 현직 동인으로서 고대 신문 무슨 행사에서 만났는데 다른 선배들이 너 저 선배 모르냐고. 완전 전설적인 분이라고 그러는데 딱 뵀죠. 그러면서 서로 자취생이었고 같은 여자였고 이러면서 서로 공감대가 있다 보니까 우리 집 한번 놀러올래 이래서 수유리 자취방에 놀러간 게 언니하고 가까워진 계기가 됐죠.
◇ 정관용> 그리고 보니까 70년대에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앞장섰었고 옥고도 치르고 그런 일도 있었나요?
◆ 서명숙> 네, 그 언니 같은 경우는 저는 더더구나 운동권이 아니었고요. 저는 정말 그냥 문학소녀에 가까운 그리고 기자가 되고 싶어해서 고대신문사를 다녔던 되게 실무적인 사람이었어요. 기자가 돼야지, 유명한 기자가 돼야지. 그다음에 우리 현실을 비판하는 기자가 돼야지 그 정도까지지. 저는 이념서클도 한번도 안 들어갔어요. 우리가 목격한 78년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벌어진 그때 당시에 굉장히 큰 시위가 있었거든요. 아주 우연발생적으로 벌어진 세종문화회관 앞 시위라고 역사적으로 잘 명칭도 안 정해진 시위인데.
◇ 정관용> 저도 처음 들어보는데요.
◆ 서명숙> 그게 1978년도 6월달에 벌어진 시위였는데 굉장히 탄압국면이었기 때문에 긴급조치가 구호가 발동되고 난 다음에 그 어떤 시위도 하지 못하고 75년도 고대의 위수령으로 탱크가 학교에 들어오고 한 달 동안 휴교가 된 이후로는 76년부터는 어떤 시위도 없었어요. 그런데 78년도에 시위가 있을 거다, 광화문에 모여보자 해도 설마 시위가 진행이 되겠어. 벌어지겠어 이러면서 갔는데 엄청난 시위가 벌어진 거예요. 자연발생적으로. 그리고 경찰도 어어 하다가 이제 너무 학생들이 숫자가 많아지니까 통제도 안 되고 그러면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구속됐어요. 저희들은 이제 하다가 무서워서 그냥 집에 갔는데.
◇ 정관용> 도망가시고.
◆ 서명숙> 도망갔죠. 그런데 하이힐 벗겨지고 난리였어요. 저희들은 또 여학생 같은 옷차림으로 가야 안 잡히기 때문에. 그리고 막.
◇ 정관용> 치마 입고.
◆ 서명숙> 치마 입고 가니까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언니가 갔다 와서 하는 얘기가 우리가 그래도 구속된 애들 닭장차에 잡혀가고 질질질 비료포대처럼 막 끌려갔어요. 우리가 보는 눈앞에서. 그런 학생들이 구류로 살다가 나온 애도 있지만 구속된 친구들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국내 언론에는 하나도 보도가 안 됐어요. 단 한 줄도. 외국의 신문이나 아사히 같은 데만 보도됐다고 저희들은 들었는데 지금처럼 SNS로 공유되거나 온 세계에 인터넷으로 공유되는 시대가 아니니까. 다음 날 신문에 한 줄도 안 나오는 거예요.
◇ 정관용> 그래서요?
◆ 서명숙> 신문, 방송에서 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알음알음 다 알죠. 그래서 그 친구들을 돕는 그런 것부터 한 거예요. 여학생들답게. 그때 당시에 여학생들이 누구 피 닦아주고 누구 뭐하면 물 떠다 주고 이랬다는 전설만 듣고 있을 때인데 우리 옥바라지라도 하자. 그래서 책도 넣어주고 그러면서 언니는 한 발짝씩, 한 발짝씩 그런 경험들 속에서 더 깊이, 깊이 세상하고 맞닥뜨리는 그리고 어떤 독재정권하고 맞서는 그런 쪽으로 조금조금 세게 진화하기 시작한 겅죠.
◇ 정관용> 그러다가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어떤 사건으로 구속됩니까? 그게 무슨 사건?
◆ 서명숙> 그것도 산천초목 사건이라고. 경찰이 내부에서 붙인 이름이에요.
◇ 정관용> 자기들끼리 묻힌 이름이요? 그때 작명은 경찰이나 안기부가 했을까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랬는데?
◆ 서명숙> 그래서 다 했는데 정작 저는 제주도로 교생실습을 간 거죠. 4학년이니까. 교육학과이니까. 이제 끝나면 선생님을 하든지 기자를 하든지 할 생각으로 교생실습을 일부러 제주도로 자원했어요, 모교로. 그리고 갔는데 고향에서 토요일날 학교에 다 인사하고 나 이제 월요일부터 교생실습 나옵니다. 그때 토요일 수업이 있었잖아요. 다 인사하고 갔는데 일요일날 우리집에서 우리 엄마, 아버지가 보는 데서 경찰이 와서 서울에 처음부터 포승줄로 묶어서 잡아간 것도 수갑 채워서 잡아간 것도 아니고 그냥 서울에 얘 잠깐 데려가서 조금 참고로 좀 조사할 일이 있다. 이래서 저희 엄마는 그러냐고, 빨리 와야 된다고. 빨리 와서 교생을 해야 된다고 그러면서.
◇ 정관용> 영문도 모르고. . .
◆ 서명숙> 네, 영문도 모르고 어떤 선배랑 연결된 일이 있어서 그랬다. 그래서 엄마는 방학 때마다 형사들이 자주 방문을 했기 때문에 문제 학생으로. 그런 일환인가 하고 그런데 서울에 보내는 거니까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 엄마가 비행기값 3인분을 줬어요. 왕복 비행기값을. 다시 오리라고 생각하고.
◇ 정관용> 그런데? 그런데? 가 봤더니?
◆ 서명숙> 출장비 나왔을 텐데 비행기값을 받아간 거예요. 우리 엄마 아직도 그 돈에 대해서 억울해하세요.
◇ 정관용> 안 돌려줬어요?
◆ 서명숙> 안 돌려줬죠. 그냥 개인적으로 착복한 거죠. 출장비 나왔잖아요. 공항에 딱 내렸는데 공항에 딱 내리니까 그때까지 친절하게 동네 아저씨같이 했던 형사분들은 서울 형사들한테 저를 딱 103호실에서 인계하고서 가버리고 그 서울 아저씨들은 완전히 프로 같은 얼굴로.
◇ 정관용> 산천초목사건이 어떤 사건이에요?
◆ 서명숙> 그게 4. 19연합시위를 도모했다는 거죠, 이십 몇 개 대학이. 그래서 가 보니까 갔는데 눈을 딱 가렸어요.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차를 타고 검정 차에 기다리던 차에 딱 태우고 두 눈을 가리고 갔는데 그 눈 가리고 가서 눈 가리고 나왔기 때문에 31일 동안 어떤 장소에 있었는데 어느 장소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몰라요. 4월 15일에 들어가서 우리가 5월 16일에 세상 밖으로 나왔거든요. 그런데 들어가니까 눈 가리고 들어갔는데 3층인 것 같은데 딱딱딱 감으로 볼 때는. 눈 가리고 계단을 올라간 그걸 볼 때는. 그런데 나와서 후반부에 형사들이 너희가 산천초목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무슨 사건을 들었는지를 얘기도 안 하고 무조건 백지 주면서 눈 풀어놓고서는 백지 주면서 3일 동안 잠을 안 재우고 무조건 네가 살아온 지금까지 일을.
◇ 정관용> 무조건 써라.
◆ 서명숙> 무조건 써라. 이거야. 단 하나도 빼뜨리지 말고. 3일 동안.
◇ 정관용> 잠도 안 재우고. 구타나 이런 건 없었고요?
◆ 서명숙> 나중에는 구타도 있었죠. 그런데 처음에는 구타까지는 안 하고 무조건 써라. 그런데 이제 저는 이제 뭔가 하여튼 유인물을 작성했던 거. 영초언니랑 유인물을 작성했던 게 있었거든요. 등사기로. 박정희 독재정권 우리 타도해야 된다. 어떻게든 우리 민주사회로 돌아가야 된다. 이런 식의 메시지를 담은 유인물을 작성해서 제가 그해 세종문화회관 이후의 시위 그다음에 9월에 고대에서의 시위 이후에 10월달에 그런 걸 막 여러 대학을 돌아니면서 뿌린 적이 있었어요. 몰래몰래. 그것이 뒤늦게 산천초목사건을 조사하다 보니까 우리 그 사건이 다 걸려든 거죠. 그래서 저는 그 건으로 들어간 거예요.
◇ 정관용> 그래서 몇 년.
◆ 서명숙> 몇 년을 살지 않고 재판이 진행되던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 정관용> 10.26이 터지고.
◆ 서명숙> 10.26이 터지고 그러면서 10.26 터져서 당장 나온 건 아니고 그해 겨울에 12월에 나왔죠. 4월달에 잡혀들어가기 시작해서 12월달에. 그냥 봄, 여름, 가을, 겨울을.
◇ 정관용> 천영초 선배는?
◆ 서명숙> 천영초 선배도 다 일시에 풀렸죠. 겨울에.
◇ 정관용> 어쨌든 경찰은 79년 4월 19일 연합시위를 기획한 주모자로 천영초를 지목한 겁니까?
◆ 서명숙>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가 보니까 어마어마하게 두 명이 이미 대통령한테 직보를 하고 청와대에. 두 명이 승진을 했었고 1개급 특징을 하고. 일망타진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여학생들이 한 20명 가까이. 관계자들이 다 끌려왔으니까.
◇ 정관용> 만약에 10.26 사건이 없었다면 거의 제2의 민청학련 비슷하게 갈 수도 있었겠는데요.
◆ 서명숙> 그렇게까지는 못 갔을 게 털어봐도 너무 없으니까. 영초 언니가 전남대 학생하고 같이 하기로 한. 조봉훈이라고 나중에그분도 꽤 유명한 분인데 그분하고 하기로 한 것밖에 나온 게 없으니까. 26개 대학은 언니의 머릿속에 로망이었던 거예요. 실제 재촉하니까 다 뭐 이렇게 안 한다고 그러고 못하고 또 호응이 없었고 그래서 이 사람들도 크게 보고는 했지만 큰 사건이 결국은 되지는 못했어요.
◇ 정관용> 그래도 대통령 직보하고 이미 특진까지 했으면 어떻게든 만들어냈었을 겁니다.
◆ 서명숙> 그래서 밤중에도 느닷없이 와서 몸을 밟고.
◇ 정관용> 구타당하고? 전기고문 같은 건 없었어요?
◆ 서명숙> 고문하겠다고 두 눈 가리고 들어올 때처럼 두 눈 가리고. 그리고 지하실에 고문실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북부서에 정보과장인지 그랬는데 그 남자가 자기가 미국에 가서 CIA에서 고문 교육을 정말 고도의 고문교육을 받고 왔다는 거예요. 기술자다. 그러면서 너가 남자들도 이거 고문에 1분도 못 견딘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독종이니까 한 1~2분 견딜 수도 있다. 그리고 남자는 이거 고문받으면 아이를 못 만들고, 여자는 못 낳는다. 이러면서 아이는 두 번째 문제고 저는 그때 결혼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문받아서 전기고문 당할 생각 하니까 너무 무서운 거예요. 지하로 계속계속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는데, 눈 가린 채로. 지하 1층 앞에 딱 세워놓고 지하 1층이래요. 지하 1층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지하 1층이라고 그러면서 딱 앞에 세워놓고 방송에서 얘기하기는 좀 뭐하지만 책 보시면 아실 거예요, 제가 어쨌는지는.
◇ 정관용> 그런 시대, 민주주의라고는 없고 인권이라고는 없던 시대. 감옥의 풍경은 어땠어요?
◆ 서명숙> 감옥, 이제 감옥에 갔죠. 성동구치소에 갔는데 성동구치소는 서대문구치소랑 달라서 정치범들이 거의 특히 여사에는 온 적이 없어서 독방이 딱 2개밖에 없었어요. 하나는 살인을 저질러서 온 여자가 있었고 그래서 영초 언니만 주범이니까 하나 독방으로 주고 저는 사기간통방에 갔고 저랑 또 공범인 박종원 선배라고는 여자분인데. 그분도 한신대 졸업. 그분은 또 절도방에 갔어요. 그런데 저는 사기 간통방에 가니까 40대 여자들. 주로 계사기로 오신 분들. 간통은 몇 명 안 되고 주로 계사기로 온 분들이었는데 17명이 5. 5평에 사니까 그냥 다닥다닥. 그리고 위에 있는 사람은 크게 차지해서 자요. 오래된 사람은.
◇ 정관용> 고참은?
◆ 서명숙> 기득권자로 갑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점점 갈수록 밑에는 조그마하게 칼잠을 자야 되는데 옆으로 모로 누워서 자야 되는데. 저는 22살 여대생이잖아요. 그리고 신입이니까 바로 그냥 화장실, 그 똥통이라고 그러죠. 푸세식 화장실 그때. 지금 박근혜 씨나 최순실 씨가 쓰는 독방에 있는 수세식이랄지 밑에 냉난방되는 보온 판넬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차가운 마루 바닥에. 바로 앞에 똥통 앞에서 자야 되는 거예요. 저는 정말 그 사람들이 정말 지금의 감옥 환경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언어도단,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크게 지은 죄도 없이 독재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가서 대학교 4학년 때 부모한테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 정관용> 천영초 씨는 그 후 어떻게?
◇ 정관용> 90년대 초반 민중당 활동도 하시고.
◆ 서명숙> 하다가 나중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거죠. 언니는 이제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중학교 공부 굉장히 잘했던 애인데 지금같이 학교폭력, 왕따 이런 걸 당했던 거예요. 그래서 언니는 캐나다 이민가고 정문하 선배는 그냥 국내에 남아 있다가 굉장히 불우하게 돌아가셨죠.
◇ 정관용> 남편분이?
◆ 서명숙> 네.
◇ 정관용> 천영초 씨는?
◆ 서명숙> 영초 언니는 캐나다 가서 잘 자리잡고 사는 것 같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래서 차가 세 번을 구르는 그런 사고를 당해서 아들하고 대학교 아들이 수제였거든요. 아들하고 대학교에 보러, 미리 보러가는 거 있잖아요, 외국에는. 자기 아들이 다닐 대학, 토론토공대를 미리 보러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본인이 운전하다가. 본인이 굉장히 운전을 잘하거든요. 운전하다가 사고 나서 뇌를 다쳤어요. 그래서 뇌수술을 3번이나 했는데 지금도 기억이 두 눈은 실명됐고, 그때. 지금 거의 안 보여요. 조금 나아졌다고 하는데 어렴풋이 희미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 정관용> 그리고 기억도 잃었어요?
◆ 서명숙> 기억도 많이 잃어서 대개 의사가 판정하는 것은 판정하는 의학적인 나이는 정신적인 나이는 4살 정도 같다는데. 지금도 그런데 운동권 때 데모할 때 불렀던 어느 민족 누구게 나 결단할 때 있나니 이런 노래는 3절까지도 부르더라고요.
◇ 정관용> 지금 국내에 계세요?
◆ 서명숙> 국내에 몇 년 전에야 돌아왔어요. 몇 년 전에 돌아와서.
◇ 정관용> 서명숙 이사장 보면 알아봐요?
◆ 서명숙> 눈으로는 못 알아보죠. 그런데 목소리로. 지금도 전화통화 하면 너 명숙이지, 제주도지? 교육학과였지 그러면서 그다음 말은 너 올레에서 올레길 낸 창시자가 됐다며 이렇게. 굉장히 단순한 얘기를 반복적으로.
◇ 정관용> 그래도 4세라고 말하기는 조금 그런 데요?
◆ 서명숙> 그런데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4세라고 하는 거죠. 기억이나 그런 말을 하는데.
◇ 정관용> 특별한 몇 가지만 기억하시는 거군요.
◆ 서명숙> 어떤 사람이나 상황도 부분부분 기억하고.
◇ 정관용> 70년대 그리고 80년대, 90년대까지 거목하던 시기에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되고 또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많은 동료들도 지원하게 되고 또 다양한 활동을 벌이시던 분. 그들이 겪은 고초. 어떤 생생한 기록들이 있었는지를 내가 좀 보여주마. 그 책이 영초언니라는 책이군요.
◆ 서명숙> 네, 게으른 저를 또 올레랑 사랑에 빠져서 올레길 내는 거에 푹 빠져서 그 과거의 기록을 마무리짓지 못한 제게 최순실 씨가 어떻게 보면 도발을 그런 걸 강하게 할 계기를 준 거죠. 고맙다고 해야 될지,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 정관용> 우리 오늘 이야기 처음 시작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나 최순실 씨 꼭 좀 봤으면 좋겠다 했는데 두 사람은 제가 볼 때 안 볼 거고요. 이 책은 정말 누가 봐야 될까요? 요즘 젊은이들이 봐야 되지 않을까요?
◆ 서명숙> 지금의 20~30대들이 어떤 사람들의 어떤 노력과 어떤 열정으로 그래도 민주화의 첫 단추들이 열렸는지 박정희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었는지.
◇ 정관용> 맞습니다. 특히 촛불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그냥 축제처럼 민주주의가 되는 걸로 생각할지도 몰라요. 요즘 우리가 그 수준이 됐죠. 하지만 30~40년 전에 그렇지 않았다는 걸 좀 알아다오, 기억해 다오, 그런.
◆ 서명숙> 목숨 걸고 했던 사람들, 물론 저는 그런 경우가 아니고 저는 비겁했던 사람 중에 하나지만.
◇ 정관용> 영초언니라는 책을 들고 오신 제주 올레의 서명숙 이사장 오늘 오랜만에 함께 만났습니다. 오늘 감사합니다.
◆ 서명숙>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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