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마리의 토종닭이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널브러져 있고, 2평 남짓한 닭장 안은 온통 닭털과 핏자국으로 범벅돼 있었다.
같은 날 바로 옆 육모(73)씨의 오골계 농장도 습격을 받았다. 6마리의 어미 닭이 처참하게 물려 죽었고, 1마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들이 사는 마을에는 산이 많다. 가끔은 멧돼지나 고라니가 민가 주변까지 내려올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닭장 습격자로 족제비나 오소리 같은 야생동물을 지목했다. 한밤중 철망을 뚫고 닭장에 침입해 무자비하게 닭을 죽이고, 사체 일부를 뜯어 먹은 것이 사냥에 능한 산짐승 소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안 방범용 CCTV가 확인한 습격자의 모습은 주민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그곳에는 낯선 개 2마리가 서로 장난치면서 닭을 물고 가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모두 잠든 오전 3시50분 어둠을 헤집고 나타나 끔찍하게 닭을 사냥한 '범인'은 다름 아닌 떠돌이 들개였던 것이다.
신씨는 "서너 마리의 닭을 현장에서 먹어치우고, 1마리는 산채로 입에 물고 가는 모습이 개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 마을에는 지난해 1월에도 멧돼지 떼가 출몰해 주민 1명을 다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는 "당시 멧돼지 공포로 마을이 술렁거렸는데, 이번에는 맹수가 돼 나타난 들개 때문에 주민들이 외진 곳을 꺼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유기견들이 소·닭 등을 가축을 습격하는 포식자가 돼 농촌마을에 나타났다.
살아 있는 먹잇감을 사냥할 정도로 야생성을 회복했지만, 민가 주변을 떠나지 않고 어슬렁거리면서 주민에게 해를 끼치는 공포의 대상이 된 셈이다. 주민들은 맹수화 된 들개가 사람을 공격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며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월 22일 옥천군 군서면 오동리의 한우농장에도 들개 3마리가 침입해 10개월 된 송아지 1마리를 물어 죽였다.
희생된 송아지는 체중 250㎏에 육박하는 제법 큰 몸집이지만, 맹수로 돌변한 들개 떼를 당해내지 못했다. 들개 떼는 송아지를 쓰러뜨린 뒤 엉덩이와 꼬리 부분 일부를 뜯어먹는 포식성까지 보였다.
농장 주인 손모(75)씨는 "소란한 소리에 달려가 봤더니 커다란 개 3마리가 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며 "흡사 야생의 늑대 같았다"고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지난 3월 27일 대전시 유성구의 토종닭 농장도 들개의 습격을 받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미처 농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들개 2마리를 붙잡아 동물보호센터에 인계했다.
야생성을 회복한 들개는 전국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서울에만 140마리가 넘는 들개가 북한산·인왕산·관악산 주변에 무리 지어 생활하면서 등산객을 위협하거나 먹이를 찾아 주택가를 어슬렁거린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산간지역도 멧돼지와 더불어 들개 떼가 활개치고 다니면서 가축이나 사람을 위협한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들개는 멧돼지보다도 활동 반경이 훨씬 넓어 개체 수나 서식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야생에 적응한 개는 포획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옥천군은 한우농장을 습격한 들개를 붙잡기 위해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포획작전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3마리를 붙잡았다. 옥천군은 닭들을 습격했던 들개 포획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군 관계자는 "주변에 3∼4마리의 들개가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됐지만, 포획틀을 설치한 뒤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며 "민첩하고 눈치 빠른 개들이 사람에게 좀처럼 틈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들개와 마주치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전 야생동물 구조관리센터 오제영 수의사는 "개의 조상은 이리나 자칼(jackal)로 알려졌으며, 오랫동안 사람 손에서 벗어나게 되면 어느 정도 야생성을 회복한다"며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약자라고 판단되는 노인이나 어린이 등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