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폼 전쟁' 韓 빙상, 왜 일괄 착용만 고수하나

'이 유니폼 계속 입고 싶은데...' 대한빙상경기연맹은 지난달 새 유니폼 공급업체를 선정했지만 기존 업체였던 휠라는 구체적인 실험 결과까지 배포하며 경기복 선정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내년 2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이른바 '유니폼 전쟁'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사진은 '빙속 여제' 이상화가 휠라 유니폼을 입고 국제대회에 나선 모습.(자료사진=대한빙상연맹)
한국 빙상 대표팀의 '유니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대한빙상경기연맹이 공모를 통해 새 유니폼 제작업체를 선정했지만 이전 유니폼 공급업체가 자사 유니폼의 경쟁력이 더 낫다는 구체적인 분석 자료를 배포하며 언론전을 이어가고 있다.

휠라는 17일 빙상연맹이 선정한 헌터 사의 유니폼과 이전 휠라 유니폼을 비교 실험한 결과를 공개하며 "0.01초가 승부를 가르는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기록이 크게 저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우주항공연구소(DLR)와 네덜란드국립우주항공연구소(NLR)가 합작 투자해서 설립한 '독일·네덜란드 윈드터널(DNW)'에서 시행한 실험 결과다.

이 실험에서는 이전 대표팀 유니폼인 휠라의 스포츠 컨펙스 소치 올림픽 버전과 연맹이 새롭게 선정된 헌터의 2016-2017시즌 플랜티나팀의 최신 버전 스피드스케이팅 러버수트가 대상이 됐다. 그 결과 휠라 유니폼의 무게는 300g으로 헌터 제품보다 35g 가벼웠으며, 스피드에 직결되는 공기 저항도 10% 이상 낮은 것으로 나왔다.

서울대 체육교육과 안주은 교수는 이에 대해 "선수의 스피드에 충분히 영향을 미치는 매우 유의미한 결과"라면서 "이상화의 경우 소치올림픽에서 세웠던 37초28의 기록보다 최소 1초 이상 기록 저하가 나올 수 있는 실험 수치"라고 밝혔다. 이어 "스케이트와 빙판 사이의 마찰력이 공기 저항보다 10배 정도 중요하다고 해도 운동복만으로 0.1초 정도의 기록 차이를 야기할 것이라는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휠라가 배포한 자사 유니폼과 헌터 유니폼의 실험 결과 그래프.
연맹은 지난 2012년 10월부터 휠라가 공급하는 네덜란드 업체 스포츠 컨펙스의 유니폼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경기복에 대한 선수들의 불만이 나왔다는 이유로 지난 시즌 뒤 공모를 통해 새 유니폼 업체 선정에 나섰다.

하지만 휠라 측은 "평창올림픽을 1년도 남기지 않은 가운데 유니폼 교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선수들의 불만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연맹이 다른 이유로 새 업체를 선정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연맹의 실권자가 다른 업체를 이미 낙점한 가운데 선수들을 앞세워 교체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맹은 "선수들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휠라 제품을 포함해 원점에서 경기복을 선택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후 연맹은 일본 미즈노, 휠라, 헌터 등 3개 업체 유니폼을 대상으로 선수 8명이 직접 착용해 비교 평가하는 과정을 거쳤고, 지난달 25일 7명이 선호한 헌터 제품을 새 유니폼 공급업체로 낙점했다.


휠라는 그러나 자사 제품을 더 선호하고 유니폼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는 '빙속 여제' 이상화(스포츠토토)의 인터뷰를 들어 연맹의 결정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화는 당시 유니폼 테스트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모 매체와 인터뷰에서 "기존 유니폼을 입고 싶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이상화는 기존 휠라 유니폼을 입고 500m 신기록을 달성한 데 이어 소치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바 있다.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간판 이승훈이 지난 2월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매스스타트에서 역주하는 모습. 이때도 유니폼은 휠라 제품이었다.(자료사진=대한체육회)
연맹과 휠라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선 상황에서 '유니폼 전쟁'이 마무리될 수 있는 방안은 과연 없는 걸까. 이상화 등 일부 선수가 기존 유니폼을 원한다면 이를 허용할 수는 없는 걸까.

축구의 경우 국가대표팀이나 소속팀과 계약한 업체와 다른 용품을 선수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축구화다. 경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선수 개인에게 맞는 축구화가 허용이 된다. 공식 스폰서 업체가 아닌 경우가 많다. 국내 프로야구 역시 배트나 글러브의 경우 선수 개인이 용품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빙상도 경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케이트는 선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경기복의 경우는 연맹과 계약한 업체 제품을 일괄적으로 입어야 하는 상황이다. 방송이나 언론 노출 등 광고 효과 등을 고려해 후원 계약 규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 빙상은 쇼트트랙은 물론 스피드스케이팅까지 최근 올림픽과 세계 대회 등에서 성적이 좋아 광고 효과도 그만큼 크다. 휠라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실제로 휠라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약 50억 원을 들여 스포츠 컨펙스와 새 경기복을 제작했다. 거액을 들였음에도 다른 업체를 찾아나선 연맹의 결정에 억울함을 토로하는 모양새다.

휠라 제품은 기록 단축에 용이해 스피드스케이팅 단거리 종목에 유리하다는 평가다. 이상화가 선호하는 이유라는 게 휠라 측의 설명이다. 반면 공기 저항 등 경기복의 요인보다는 경기력이 상대적으로 더 큰 변수가 되는 장거리나 쇼트트랙은 유니폼 착용의 편안함이나 안전성이 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점퍼는 역시 N사!' 빙상연맹의 경기복 선정이 논란이 되면서 기록에 민감한 종목의 경우 선수가 선호하는 유니폼을 분리해 적용하는 방안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된다. 사진은 쇼트트랙 심석희가 훈련하는 모습.(자료사진=이한형 기자)
이런 상황이라면 종목에 따라 다르게 유니폼을 적용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선수들에게 다수결로 일괄적으로 유니폼을 입게 하기보다는 합리적일 수 있다. 연맹이 유니폼 선정의 가장 큰 기준으로 내세운 선수들의 의견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이다. 다수결 속에 피해를 보는 소수의 선수를 구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광고 노출 효과가 분산돼 업체의 후원 계약 규모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맹이 제 1 원칙으로 내세운 게 평창올림픽의 성적이라면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휠라 측에서는 이런 방안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논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공들여 개발한 유니폼이 쓰일 수 있다면 검토해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연맹에서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연맹 관계자는 "사실 이상화가 헌터 유니폼을 입고 테스트에 참가하진 않아 나중에라도 선호 의견을 밝힐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이상화가 테스트 이후에도 휠라 제품을 원한다면 연맹 차원에서 논의를 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평창올림픽을 9개월 정도 앞둔 가운데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 빙상연맹의 '유니폼 전쟁'. 과연 선수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연맹과 업체가 '솔로몬의 지혜'를 찾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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