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당신(노무현)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한탄하듯 말했던 문 당선인은 "이제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참여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적폐청산'을 통해 '재조산하(再造山河: 나라를 다시 만들다)'를 이루겠다는 문재인의 도전, 참여정부를 뛰어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도전에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있다
문 당선인은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의 부모는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월남했다. 문 당선인은 부친을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분"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막노동을 했고 어머니는 문 당선인을 업고 계란 행상을 했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부산으로 이주한 가족은 연탄 배달로 생계를 이어갔다. 문 당선인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경남 중·고에 입학했지만 빈부 격차가 확연한 교내 분위기에서 인권의식을 싹틔웠다고 한다. 그는 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 "공평하지 못한 것, 공정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고뇌와 분노의 시작이었다"며 자신의 인권의식의 맹아가 가난한 어린 시절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기술했다.
석방 뒤에는 강제징집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에 배속됐다. 당시 여단장이 전두환 준장,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대응작전에 완전무장을 한 채 투입되기도 했다.
1978년에 전역을 했지만 구속 전력으로 복학이 안 돼 '낭인' 시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부친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깊은 회한을 안고 49재를 치른 뒤 전남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1979년 1차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2차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 시위에 나섰다가 또 다시 체포됐다. 유치장 안에서 당시 교제하던 김정숙 여사로부터 2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내 삶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이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이 되지 않았다. 결국 변호사의 길을 걷기 위해 1982년 부산으로 향했다. 사시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문 당선인은 "같은 과(科· 부류)라고 느꼈다"고 운명적 만남을 회상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 출마하자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문 당선인은 "아주 어려운 상황이 돼 맡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참여정부 탄생 이후에는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노 전 대통령의 말에 고사 끝에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이듬해 2월 사퇴했다. 건강 악화와 열린우리당의 총선 출마 요청을 거절하면서 생긴 불편함이 주된 이유였다.
이후 네팔에서 트래킹을 하던 중 현지 언론보도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한 뒤 급거 귀국해 노 전 대통령 변호인단에 합류했다. 탄핵소추안 기각에 일조한 뒤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이때 격무와 스트레스로 치아 10개가 빠진 일화가 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 말로 운명이다"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정치인의 길로 그를 이끌었다. 30년 동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의연했던 상주 문재인에 사람들은 주목했고, 장례식장을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친노(친노무현) 진영을 중심으로 한 '문재인 대망론'으로 2012년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 당시 후보와 단일화 진통 끝에 야권 단일주자가 됐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이후 권력 의지 부재와 확장성 부족에 따른 '문재인 필패론'이 그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대권 재도전이 시작됐지만 그의 당권 도전 이후 친노와 비노 간 계파갈등이 증폭됐다.
그의 선택은 정공법이었다.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다"며 20대 총선 불출마, 당 대표직을 내려놓고 분당사태의 후폭풍을 인재 영입으로 잠재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멘토'이자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전 의원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뒤 선 수도권 압승을 통해 민주당을 원내1당으로 만들며 유력 대선후보로 자리매김했다.
당내 경선 기간 동안에도 내내 '분열의 리더십'이라고 공격받았지만 2백만 명이 넘는 선거인단이 참여한 경선에서 전 지역경선에서 1등, 총 득표율 57%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각 당 대선후보가 선출된 뒤 안철수 후보가 지지율을 턱밑까지 추격하긴 했지만 다자구도 속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잊을만 하면 나오는 '문재인 지지율 박스권' 지적이 무색하게 그의 지지율은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올랐다.
노 전 대통령과 운명 같은 만남에서 시작된 문 당선인의 정치인생은 19대 대통령 당선으로 정점을 찍게 됐다.
올해 1월 자신의 정책구상과 철학을 담은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의 부제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 문재인이 답하다'였다. 문 당선인은 '적폐청산'을 시작으로 '재조산하'를 이루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공언해왔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밝혔듯 재조산하의 과정은 녹록치 않다.
집권여당이 된 민주당은 120석으로 원내 1당이지만 과반에 30석이 부족하고, 쟁점법안 통과를 위한 180석에는 무려 60석이 부족하다. 새 국무총리와 장관 인준을 위한 청문회가 언제 끝나 새 내각 구성이 마무리 될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당내 경선 때부터 본선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인 정권교체를 해야 국정농단 세력의 저항을 돌파해내고 개혁의 토대 위에 개혁통합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문 당선인의 호소에 국민들은 투표로 답했다. 이제 그가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국민들에게 응답할 차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