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난 대선부터 '저녁이 있는 삶'이 화두로 떠오른 이유는 비단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자들의 근무를 줄여 여가를 보장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 정책은 여가 시간에 벌이는 소비를 통한 내수 활성화 대책이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업무량을 나눠 분담하도록 유도하는 일자리 대책이며, 육아 부담을 줄이는 저출산 대책까지 세 마리 토끼를 더 잡을 수 있는 묘수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 노동시간 단축, 정부 지침 가로막혀 제자리 걸음… 차기 정부에선 해결할까
이런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도 OECD 평균 수준인 연 1800시간대 노동시간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아예 최대 연 1800시간 이내로 상한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공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문재인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안철수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등 4명의 유력 후보들은 주당 40시간, 최대 52시간이라는 법정 노동시간을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현행법상 노동시간을 넘어서 대대적인 단축을 약속한 후보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뿐이다.
심상정 후보는 2021년까지 주 40시간 준수를 정착시킨 뒤 대통령 임기 5년째인 2022년부터 저녁 5시에 퇴근할 수있는 주 35시간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후보들이 새로운 공약 대신 기존 법부터 챙기겠다면서도 노동시간 단축 공약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선 정부의 잘못된 행정해석 때문이다.
그동안 관련 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주당 노동시간 기준을 정할 때 주말은 1주일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최대 68시간 근무까지 합법이라는 행정지침을 내려왔다.
문재인, 심상정 후보 등이 집권 후 노동부 행정지침부터 폐기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사업주·노동자 반발의 해결 열쇠는 공약의 '디테일'
다만 약 10년 동안 정부의 엉뚱한 행정지침이 계속된 바람에 자칫 노동시간 단축을 서둘렀다가는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수당이나 고용 부담에 불거질 사업주들의 거센 반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관건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노동시간 단축 약속보다도 이를 위한 세부적인 실천 계획 공약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선임연구위원은 "비교적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뚜렷한 공약이 적은 홍준표 후보를 제외하면 나머지 후보들의 공약 수준은 대체로 충실하고, 서로 보완 관계에 있어 기대가 크다"면서도 "문제는 후보들의 여러 공약들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위원은 "비현실적으로 전체 노동시간만 단축하기에 급급했다가는 사업장의 꼼수로 단시간 노동자들만 급증하는 등 부작용만 늘어날 수 있다"며 "질 좋은 일자리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 노동자들의 휴식을 보장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전체 산업의 노동시간을 일괄 규제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시간 단축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약속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특히 후보들 간에 비슷한 공약들도 있어서 노동자에게 불리한 출퇴근 관행을 뿌리 뽑기 위한 출퇴근시간 기록에 관한 정책들이나, 퇴근 후 SNS 업무지시 등 돌발노동 제한 등은 문재인 후보와 유승민 후보 모두 공약으로 내걸었다.
최근 IT업계를 중심으로 잇달아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 사례가 알려지면서 논란거리로 불거진 포괄임금제에 대해서도 안철수 후보는 개선을, 심상정 후보는 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퇴근 후 11시간 휴식시간 보장제도 역시 안철수 후보는 특례업종부터 도입하겠다고 밝혔고, 유승민 후보는 업종 구분 없이 적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외에도 문재인 후보의 ▲ 유연근무제 도입 ▲ 특례업종 및 제외 업종을 축소, 안철수 후보의 ▲ 연차휴가 1/2 연속 사용 촉진 ▲ 근로시간 계좌제 및 공시제, 유승민 후보의 ▲ 초과근로 한도 규정, 심상정 후보의 ▲ 근로기준법 1인 이상 사업장 확대 적용 등도 노동시간 단축을 하겠다는 공약들이다.
또 다른 걸림돌은 노동자 스스로 노동시간 단축을 거부하는 경우다. 연장 근무를 당연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기본급보다 각종 수당으로 수입을 올리는 데 익숙한 노동자들, 특히 대기업 제조업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이 달갑지만은 않다.
민주노총 역시 지난 2일 공개한 '2017 대선후보 정책공약 비교평가 정책보고서'에서 사업주들에게 신규 채용보다 기존 노동자들의 초과노동이 유리한 현실과 함께, 기본급 비중이 낮아 잔업·특근으로 임금을 보전할 수밖에 없는 임금체계를 지적하며 "임금체계와 임금제도에 대한 대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은 "급여 삭감이 우려돼 오히려 노동자들이 잔업, 철야 근무를 원하기도 한다"며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수당도 챙기지 못한 채 주말이나 휴일에도 근무하는 등 다양한 상황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소장은 "노사 및 노사정 간의 논의와 함께 노동조합 가입률이 제고되어야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힘을 얻을 것"이라며 "임금·노조·비정규직 문제 등 현재의 노동 구조를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