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가 안되니까…" 선거에서도 차별받는 장애인들

[선거문화 이제 바꿉시다 ④] 힘없는 소수자에게 이번에도 그저 "기다려라"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 사태로 치러지는 장미대선에서 각 후보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표몰이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새 시대를 열겠다는 후보들의 다짐이 무색하게, 구태 선거문화가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선거문화 이제 바꿉시다' 연속기획을 통해 시대적 요구와 괴리된 선거문화를 짚어보고 변화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촛불민심 어디가고…" 구태 선거범죄 판치는 장미대선
② 급증하는 '가짜뉴스'…"고모 카톡도 차단했죠"
③ "유세차 시끄러워"…21세기 유권자와 19세기 선거운동
④ "표가 안되니까…" 선거에서도 차별받는 장애인들
계속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선거에서도 장애인들은 정보의 제한이나 접근성의 문제로 매번 투표권에 제약을 받아 왔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장애인들은 '사각지대'를 직접 해소하겠다며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나 그저 "기다리라"는 대답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 "투표용지를 대신 넣어준다고?"

3살 때 걸린 소아마비로 인해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박김영희(56·지체장애 1급) 씨는 지난해 총선에서 사전투표를 시도하다 눈물만 삼키고 돌아왔다.

2층에 사전투표소가 마련된 집앞 동주민센터에는 승강기(엘리베이터)가 없던 탓에 1층에 별도로 장애인투표소가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신분증이나 투표용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현장 관계자는 당시 "신분증을 주면 투표용지를 갖다 주겠다. 여기서 투표하시면 용지는 제가 2층에 있는 투표함에 넣어드리겠다"고 말했다. 비밀투표 원칙에 정면 배치되는 조치다.

이를 거절하자 투표소 측에서는 5명의 직원이 매달려 휠체어를 2층까지 들어주겠다고 하다 나중엔 사람이 부족하다며 아예 다른 투표소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동용 차량이 1시간 넘도록 도착하지 않자 박김 씨는 결국 허탈해하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취재진과 만난 박김영희(56) 씨 (사진=김동빈 수습기자)
박김 씨는 "주변에서는 '힘든데 그렇게까지 투표를 꼭 해야겠냐'고 한다. 하지만 선거는 우리 장애인들이 주권자로서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지 않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 토론자는 5명인데 수화통역사는 1명

인권단체 '장애인정보문화누리'는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악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각장애인 함효숙(46·오른쪽) 씨는 이 자리에서 수화를 이용해 성명서를 읽고 있다. (사진=김광일 기자)
청각장애인 함효숙(46) 씨는 지난달 26일 페이스북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대선 후보들의 TV토론 편집영상을 보고 경악했다. 전날 생방송을 보면서 수화(수어)통역사의 손짓을 보고 이해한 것과는 내용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대화가 1명의 통역사에게서 전해지다 보니 생방송 당시 함 씨는 "동성애 반대하시냐"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질문과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답변에서 질문자와 답변자를 거꾸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집에서 함께 TV토론을 지켜보던 딸 역시 청각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발언을 교정해줄 사람도 없었다. 함 씨는 최근 CBS노컷뉴스 기자와 만나 "그때 굉장히 바보가 된 것 같았고 무시당한 느낌까지 들었다"고 통역사를 통해 말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인권단체 '장애인정보문화누리'는 지난 2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아 "더 많은 통역사를 화면에 배치해달라. 당장 어렵다면 최소 3인은 배치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후 2차례 열린 TV토론 화면에도 수화통역사는 1명씩만 배치됐다. 이에 대해 선관위 측은 그저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이 단체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진정'을 내면서 인권위는 조사에 착수했다.

발달장애인 김정훈(27·지적장애 3급) 씨 또한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손 떨림이 심해 앞선 선거에서 손이 미끄러져 '무효표' 처리된 경험이 적잖기 때문이다.

김 씨는 "훈련된 '공적조력자'가 도와주거나 아니면 투표용지에 칸이라도 넓혀줬으면 좋겠다"면서 "선거공보물도 지적장애인들에게는 쉽게 쓰여진 판이 제공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 '표'가 없다보니 정치인들도 무관심

그러잖아도 소수인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이처럼 표심으로 직결되지 못하는 까닭에 장애인 관련 정책은 정치인들에게도 무시되기 십상이다.

장애인인권포럼 박창우 사무차장은 "정치인 입장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봐야 이 사람들이 나를 뽑을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냐"면서 "그러다 보니 장애인들은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이래저래 소외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장애인단체들은 이에 따라 "장애인 참정권 확보를 위한 정당한 편의를 하루빨리 제공하라"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요구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러한 요구를 이번 대선에서 바로 적용하긴 어렵다며 난색을 보였다. 선관위 관계자는 "그동안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으나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선거 뒤 본격적으로 연구해 적용하겠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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