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문자메시지는 발신 번호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수신됐으며, 급기야 아이가 바꿔준 전화를 받아 든 최 씨는 마음이 철렁했다.
"다짜고짜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하는 거에요. 전화를 새로 샀는데 아이의 전화다 잘못 거신 거라고 얘길 해도 믿질 않고 돈을 갚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기존 휴대전화 번호 이용자가 채권 추심을 피해 번호를 바꾸면서, 아이의 번호로 빚 독촉 전화가 걸려온 것. 참다 못해 최 씨는 아이의 전화번호를 다른 번호로 바꿨다.
이달 초 전화번호를 바꾼 김 모(44) 씨는 밤 12시만 넘으면 걸려오는 대여섯 통의 전화 때문에 한동안 밤잠을 설쳐야 했다.
김 씨는 "바꾼 전화번호의 전 이용자가 알고 보니, 밤에 동대문시장에서 일했던 분이였다"며 "처음에는 번호가 바뀌었다고 일일이 대응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계속 전화가 걸려와 어쩔 수 없이 보름도 안 돼 또다시 번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 기존 사용자 흔적 지우려면…번호 재활용 제한 기간 늘려야
두 사람 모두 전화번호에 남은 이전 사용자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면서 피해를 겪게 된 것이다.
27일 정부 담당 관서인 미래창조과학부와 이동통신 사업자들에 따르면 정부는 이같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지된 번호는 28일이 지나야 제3자에게 다시 줄 수 있도록 하는 휴대전화 재활용 제한 기간 이른바 '에이징 기간'을 두고 있다.
문제는 28일이라는 기간이 옛 사용자가 카드·보험 등 온갖 곳에 흩뿌려 놓은 번호들을 모두 변경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자주 이용하지 않는 인터넷 사이트·멤버십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곳의 번호를 바꾸지 않을 경우 추후 다른 사용자에게 문자나 전화가 갈 여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이동통신사들 입장에선 문제 해소 방안으로 에이징 기간을 더 늘리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다. 효율적인 가입자 유치를 위해 한정된 전화번호 회선내에서 최대한 많은 가용 번호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사들이 번호를 바꾼 이용자가 불편하더라도 스팸 설정이나 스미싱 방지 어플 등을 이용해 일일이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스미싱 방지 어플을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고, 스미싱 문자는 최대한 네트워크 자체에서 걸러내려고 하지만 원천적인 차단은 불가능하다"며 "그렇다고 영업 직원들한테 번호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 신규가입자·번호 이동자 고충 외면하는 미래부
미래부 역시 한정된 번호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에이징 기간을 늘리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미래부 관계자는 "(에이징 기간을) 28일에서 3개월로 늘렸을 때 번호 자원 낭비가 한 사업자당 10만 개 이상 될 것"이라며 "번호를 좀 더 타이트하게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부분이 더 크기 때문에 번호를 바꿨을 때 불편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부에 따르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번호 회선은 대략 8천만 개. 이중 7300만여 개를 통신사에 나눠줬고, 나머지 608만여 개는 정부가 그대로 가지고 있다.
또, 지난 2월 기준 사용중인 회선은 6100만여 개로 1200만여 개가 미사용 회선이다. 정부 보유분을 합하면 1808만여 개가 사용 가능한 상태다.
여기서 신규가입을 포함한 번호 이동자수는 증가 추이를 보면 한 달에 최대 70만 명이 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 계산해 보더라도 에이징 기간을 1년으로 늘려도 940만여 개의 회선이 사용 정지되지만 여전히 868만여 개의 회선이 가용회선으로 남는다.
종합해 보면 에이징 기간을 1년까지 늘리지 않더라도, 정부가 신규가입자나 번호 이동자의 고충을 외면한 채 회선 관리를 과도하게 보수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중앙대 이인호 법학과 교수(한국정보법학회 회장)는 "에이징 기간을 늘릴 수 없다면 (신규 가입자나 번호 이동자에게) 정확한 정보와 선택권을 줘야 한다"며 "최소한 이동통신사들이 기존 이용자의 흔적에 의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고지하도록 하거나 가장 오래된 번호부터 권하도록 하는 주의 의무를 지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