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사회생활이란 그렇게 즉각적인 승리감을 주는 곳이 아니었더라구요. 나를 버티게 했던 동력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니 남은 선택이 없네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늘 의젓하고 생각이 깊어 부모 입장에서 오히려 '받은 게 많다'고 할 정도로 소중한 아들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떴다. 흔히 자식이 먼저 죽었을 때 쓰는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은 잔혹한 현실을 나타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가족들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고'라고만 하고 아들의 죽음을 가슴속에 품어왔던 어머니는, 왜 그의 죽음을 세상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을까.
24일 오후 7시, 서울 신촌역 앨리스에서 열린 "우리는 카메라 뒤의 죽음을 기억합니다"에 참석한 고인의 어머니 김혜영 씨는 지난 6개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왜 아직도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많지?"
김 씨는 이날 행사에 오면서도 자리를 마련한 대책위(tvN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건 왜 하는 거죠?", "누가 올까요? 자기 문제도 아닌데…."
아이들에게 '공동체'를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는 학교에서조차 한 학년을 모아놓고 특강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정도로 '공동체 교육'이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의 일'에 관심 갖고 저녁 시간을 내어 준 사람들의 존재가 궁금했다. 70명이나 신청했다니 놀랍기만 했다. 발벗고 나서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워서, 병상에 있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왔다. "왜 아직도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많지?"
그러나 6개월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일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에는) 인간적인 삶을 거의 살 수가 없었다." 김 씨는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처음 상암동에 들렀을 때, 거대한 CJ E&M의 건물을 보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생각한다. 골리앗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싸운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
그럼에도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가슴 속 불덩이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김 씨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한빛 씨가 안치된 성당은 15분 거리였고, 그는 매일 성당에 가서 울며 소리쳤다. 예수님이 정말 있다면 아들을 이렇게 빨리 데려간 이유라도 알고 싶다고. 집에 와서도 잠만 잤다. 당연히 초저녁에 잠이 저절로 오진 않았다. 저녁이 이렇게 긴 줄 60년 만에 알았다.
대책위 모임에는 한빛 씨의 아버지가 나갔고, 김 씨는 가지 않았다. 가면 계속 한빛 씨의 죽음을 얘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식의 죽음을 거듭 확인하고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18일 공식 기자회견을 며칠 앞두고 한빛 씨 아버지는 간에 생긴 고름을 발견해 입원하게 됐다. "한빛이도 갔는데 나까지 당신을 힘들게 하는구나" 하고 울먹이는 남편을 보며 김 씨는 결심했다. "내가 이것도 못하면 엄마도 아니지" 아들에게 받은 것이 많은데 갚을 시간조차 갖지 못했던 김 씨는 아들이 죽음으로서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기자회견에서 읽을 원고를 써 내려갔다.
◇ "한빛과 같은 삶이 더 있어서는 안 된다"
지난해 10월 말. 대책위가 제대로 꾸려지기 전이었지만, 김 씨는 한빛 씨의 죽음 이후 '말해져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실종된 고인의 생사보다 그가 소지했던 법인카드의 행방에만 관심을 두었던 CJ E&M 측의 조문을 거부하면서 김 씨는 2가지를 요구했다.
김 씨는 "한빛의 죽음을 폄하, 왜곡, 매도한 것을 공개사과할 것과 한빛이 고민한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했다. 이 2가지가 해결되지 않으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맘"이라고 밝혔다.
사측은 55일 동안 이틀 쉬고, 하루에 통화 발신 건수만 94건에 이르렀으며, 눈만 잠시 붙였다 나가는 생활을 반복했던 한빛 씨의 근무 태도를 문제삼고, 비정규직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며 매도했다.
적금을 들어 결혼자금을 마련하라는 어머니의 말에도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각종 사회 문제(세월호, 기륭전자, KTX 승무원, 용산참사 등)에 후원금을 내며 "12월까지만 하고 내년부턴 적금 들게요"라고 말했던 한빛 씨였다. 그런 그가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사측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픈 시간을 반추하느라 이날 대화 자리는 그 어느 때보다 훌쩍이는 소리가 잦았다. 김 씨도 이야기 도중 몇 번이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얼마 전에도 밥을 차리다 "한빛, 밥 먹어!"라며 방문을 열려고 했다던 김 씨는 아들이 세상을 바꾼 '광화문 촛불'을 보지 못하고 떠난 게 못내 아쉽다. 그걸 봤더라면 조금 다른 기대를 하고 살지 않았을까 해서.
수면제나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던 남편, 군 복무 중임에도 휴가를 쪼개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던 한솔(한빛 씨 동생), 매일 성당에 들러 절규하던 자신…. 뜻밖의 죽음은 한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지만, 김 씨는 예전처럼 '패배주의'에 빠지지는 않을 거라고 강조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한빛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가 변할 수 있게 뭐라도 할 것"이란다.
앞서 대책위는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CJ E&M에 △사건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과 시민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것 △사건 책임자 징계 및 제작시스템 개선을 포함한 재발방지 대책 수립 △본 사건 문제해결을 위해 대책위와의 논의에 정식 참여할 것 3가지를 요구했다.
한편, 대책위는 오는 28일 오후 7시, CJ E&M 본사 앞에서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고 이한빛 PD 시민추모제를 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