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두호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등 신간 시집 4권

안미옥 '온', 한인준 '아름다운 그런데' , 강지혜 '내가 훔친 기적'

신두호 시인의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참신하고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감각적인 표현을 앞세워 존재와 존재, 현상과 실재가 만나는 다양한 양상과 그것의 의미를 냉철하게 고민하며 세계의 진상(眞相)을 드러내 보인다. 세밀하고 안정된 문장 속에 "형이상학과 관념론과 모호한 이미지"(함돈균, 해설)가 뒤섞인 가운데 철학적 사유가 돋보인다.

시인은 현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꿰뚫는 견자(見者)의 눈과 "없는 것을 만지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나희덕, 추천사) 탁월한 감각을 발휘한다.

주머니에서는 늘 손을 목격한다/누구의 것도 아닌/손을 위해 걸어야 했다/안개 속의 사람들이 고립되던 무렵이었다//할 말을 잇지 못하고/시야의 모든 사물로부터 멀어졌다/이글거리는 물풀이/도시에 불어나던 게 기억의 전부였다//시간이 초침 단위로 뚝뚝 끊어지고/손을 쥘 줄 모르는 손가락들이/보폭 속으로 서서히 잊히고//방향이 모든 감각으로 나뉘어갔다/곳곳에서 바지와 양말이 수거되었다/점들을 옮기려고 이동하는 몸을 만났다//(…)//사물들을 선으로 이어주는 건 혼잣말일지도 모른다/숨을 쉬어보면/밤하늘의 깊은 곳으로 옮아가는 점들//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물결//무리에 섞여드는 네가 나를 기억해냈다/구분할 수 없는 손가락들이 손에서 손으로/안개 속을 떠돌아다녔다('다가가는 행위' 부분)

거리는 시민으로 성장할 기회를 모두에게 배분합니다/비물질적인 차원으로 흩어져 있는 인류와/동식물들은 전례 없이 생략되고 있습니다/불빛마저도 안개 속에서 창궐합니다/거리에 속도만이 전시되어 있을 때/우리는 누군가로 기억될지 알지 못합니다/어깨를 부딪치고는 영원히 멀어집니다//(…)/이곳에선 언약이 악수를 대신합니다/시민들 중 누구도 사회와 접촉하지 않으며/극소량의 숨을 서로에게서 전달받습니다/최소한의 양분으로 성장하기 위해/모두들 각자의 속력으로 엇갈립니다('자연에의 입문 3' 부분)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면 착지할 수 있을까/바닥이 높은 곳이 되고/다시 떨어진 곳에서 높이를 발견한다면//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까/양손을 펴고/번갈아 뒤집어보면서/실제로 태어난 것에 감사해할 수도/있겠지만//아무것도 쥘 수 없을 때 손은/스스로의 깊이에 매료되었다/커지는가/무한해지는가/건네줄 수는 있는지//어쩌면 이는 누군가의 두 눈을 가리기 전에/피 흘리는 손목을 거두어들이는 일//물속에 팔을 담그고/바닥을 더듬으면 닿을지도 모르는/수심에서//바닥은 잃어버린 높이를 찾는다//내디딘 무게만이/매번 새로워지는 곳으로/떨어진다('높이의 깊이' 전문)

신두호 지음 | 창비 | 136쪽 | 8,000원

안미옥 시인의 시집 '온'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맨살 같은 언어로 맞이하는 시적 환대”의 세계를 펼친다. “고통과 슬픔에 힘껏 약해지려는”(김행숙, 추천사) 간절한 마음을, “낮은 목소리의 단단한 말들”(김영희, 해설)로 엮어낸 빛나는 시편들이 잔잔하면서도 순간 날카롭게 공감과 감동을 선사한다.

굴레도 감옥도 아니다/구원도 아니다//목수가 나무를 알아볼 때의 눈빛으로/재단할 수 없는 날씨처럼//앉아서//튤립, 튤립/하고 말하고 나면//다 말한 것 같다//뾰족하고 뾰족하다//편하게 쓰는 법을 몰랐다/편하게 사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건 정말일까/한겨울을 날아가는 벌을 보게 될 때//투명한 날갯짓일까/그렇다면//끔찍하구나/이게 전부 마음의 일이라니('시집' 부분)

간결한 형식과 간명한 어휘를 통해 “덜 말하는 방식으로 더 말하는”(김행숙, 추천사) 안미옥의 시에는 유독 ‘마음’이라는 시어가 자주 반복된다. 시인에게 삶은, 시는 “전부 마음의 일”('시집')인 듯하다. 그런데 “좋은 마음”과 “슬픔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부드러움에 닿고자 하는 마음”('네가 태어나기 전에')이나 “나를 좋아하고 싶은 마음”('조언')처럼 긍정의 마음은 하나같이 부재와 결핍의 상태로 묘사된다. 여기에 “무너지는 마음”이나 “상한 마음”('톱니') 또는 “부서지는 마음”('천국')이나 “긁으면 긁히는 마음”('꽃병') 같은 부정의 마음이 더해진다. 그런가 하면 “살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치료탑')는 지금, 시인은 존재와 부재, 사라지지 않는 것과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말한다.

어항 속 물고기에게도 숨을 곳이 필요하다/우리에겐 낡은 소파가 필요하다/(…)/맨손이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나는 더 어두워졌다/어리석은 촛대와 어리석은 고독/너와 동일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오래 기도했지만/나는 영영 나의 마음일 수밖에 없겠지/찌르는 것/휘어감기는 것/자기 뼈를 깎는 사람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나는 지나가지 못했다/무릎이 깨지더라도 다시 넘어지는 무릎/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한 사람이 있는 정오' 부분)


유난히 “슬픈 것에만 작동”하는 기억들 속에서 시인은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그러나 “생각하면/생각이 났”('질의응답')기에 “모두 다 소풍을 가서 돌아오지 않는”('금요일') 저녁과 “쏟아지는 물 안에 남아 있”('천국')는 ‘천국의 아이들’을 호명하며 시인은 “검고, 낮고 깊은”('질의응답') 침묵 속에서 저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한다.

모았던 손을 풀었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는다//화병이 굳어 있다/예쁜 꽃은 꽂아두지 않는다//멈춰 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의 마음을/조금 알고 있다//맞물리지 않는 유리병과 뚜껑을/두 손에 쥐고서//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너의 등을 두드리면서//부서진다/밤은 희미하게//새의 얼굴을 하고 앉아/창 안을 보고 있다//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안이 더 밝아 보인다//자주 꾸는 악몽은 어제 있었던 일 같고/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물에 번지는 이름/살아 있자고 했다('아이에게' 전문)

안미옥 지음 | 창비 | 136쪽 | 8,000원

한인준 시인의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등단 당시 “언어운용과 발화가 자유롭고, 시를 포착하고 표현해내는 감각 또한 날카롭고 새로워 시적 완성도와 가능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가뿐히 잡아냈다”는 심사평에 걸맞게 독자적이면서 개성을 뛰어넘는 시 세계를 선보인다. 형용사나 부사를 명사처럼 쓰고 명사를 동사의 자리에 버젓이 끼워넣는 등 “우리말의 관절들을 마구 찢어발”기며 도무지 “말이 안되는 국어 농단을 자행”하면서도 “망가지고 부서진 언어들로 말이 되게끔 하는 고유의 참담한 미장센”(황지우, 추천사)이 시를 읽는 재미와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한다.

나는을 어쩔 수 없이 그러면과 청바지를 동시마다 입는다고 아예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데 두 눈과 함께를 오늘도만큼 출근시키며 바다와 두개 사이에서 나는과 더이상을 하지 않고 이런 건 누가 고민 같다고 말할 때까지 강물에 서서 발목과 넘쳐흐르기만 하는 그러니까로 나는의 절반만 축축한 일이니까 그렇다고 아예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세상에는 아주만 한 조금이 있어 당신은 혼자 많은 생각으로 얼마나를 하고('종언-있' 부분)

없을 것을 위하여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있을 것을 위하여//한밤중에 깨어난 당신이 당신 옆에 놓인 물컵 쪽으로 손을 내저었을 때//목이 마르기 위하여를/문득 나는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비를 피하기 위하여 우산을 잃어버리는 사람과/배고프기 위하여 밥을 먹는 사람을/뒤바뀌는 것을/생각했던 것입니다//(…)//없을 것을 위하여 찾아볼 수가 있었습니다('종언-아름다운 그런데' 부분)

시 자체로 세계를 구성하는 말들의 매개가 되기를 바라는 시인은 ‘있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기보다는 말이 놓이는 자세와 위치를 고민하고 단어를 ‘상상’하며 시를 쓰는 듯하다.

시냇물과 발목을 한다. 자연스러운 것은//빼놓은 채로//물방울은 돌멩이로 저지르는 것이다. 정말이 보일 때까지//넌지시와 그윽과/바라보지 않는다를 바라보지 않는다는//정말이 보일 때까지만/투명한 물을 자꾸 하얗다고 느끼기/대신에 투명하게 느끼기//틀림과 다름은 아직도 우윳빛으로 흐르나//엄지와 검지로 쥐고 있는 이불 겉을/들릴 만큼의 소리라는 것으로 문지른다면//내가 있는 장면이 들린다/보이는 것이 아니라('종언-것' 부분)

한인준 지음 | 창비 | 124쪽 | 8,000원

강지혜의 시집 '내가 훔친 기적'이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불안과 상처, 폭력과 애증을 온몸으로 돌파한다. 장도리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퇴근 시간 전철에서 사랑하는 의자를 안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랑하는 의자, 사랑하는 동생,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모든 것……. 강지혜의 아름다운 돌파를 마주한 우리는, 시집의 꼬리에 입을 맞추며 이 모든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의자 들고 전철 타기'

아름다운 의자를 들고 퇴근 시간 전철에 탔다 의자는 황홀한 노래를 읊조리고 내 몸은 달아올랐다

이것은 의자, 별처럼 빛나는 의자

의자를 들고 전철에 탔지만 자리가 없었다 나는 분명히 의자를 들고 있는데 앉을 수가 없으니 나와 의자는 슬펐다 그리고 의자는 분명히 외로웠다

의자의 탑승을 바라지 않던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의자를 노려보았다

의자의 의지로 전철에 탄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의자와 함께 가야만 하고

의자의 부피와 무게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전철 안이 매우 밝다는 것

안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구겨져 들어왔다 밀지 마세요 밟지 마세요 미안합니다 미안하지만 불쾌합니다 나와 의자는 서로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오늘의 마지막 열차가 승강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안전문과 객실문이 동시에 열리고 더러운 의자 하나가 철로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거기에 없었고 사람들은 줄지 않았다

강지혜 지음 | 민음사 | 159쪽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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