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10년전 일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가 '북한에 먼저 의사타진을 해보고 유엔 북한 인권규탄결의안 찬반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는 것"이 논쟁의 골자다.
이 문제는 작년 10월 송 전 장관이 <빙하는 움직인다>는 회고록을 발간했을때 논란이 됐다. 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수면 아래로 잠시 가라앉았다.
잠복기는 7개월 뿐이었다. 북 인권 기권문제는 2017년 대선판에서 모든 외교안보이슈를 끌어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송 전 장관이 대선 한복판에서 관련 문서를 느닷없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 후보가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고 문서 공개 이유를 밝혔다.
본인의 명예가 크게 손상됐다고 하는데 수긍이 간다. 그럼에도 과연 이 시점에 그렇게 도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해야 했는지는 공감하기 어렵다.
◇ 송 전 장관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더니…
그는 작년 10월 자서전(회고록)을 발표하고 북 인권문제만 논란의 대상이 되자 섭섭함을 표시한 적이 있다. 559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속에서는 8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북 인권문제만 논쟁으로 떠오른 것을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있다. 한반도 분단과 그것을 극복하는 자신의 외교 철학과 가치관을 정리한 점을 감안하면 십분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당시 그는 "(논쟁을 보고)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바라본다"고 개탄했다. <빙하는 움직인다>의 핵심 주제는 그가 인용한 세네카의 말 속에 오롯이 녹아 있다. "어느 항구로 가는지를 모르는 뱃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바람이 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진보.보수정권을 떠나 한반도 문제에 관한한 "남이 써주던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 써야 한다"는 당찬 주장이다.
그렇게 '대의'를 강조했던 그가 북 인권 기권 결정 과정에 대한 진실문제를 대선 국면에서 제기한 것이 적절한지 논란이다. 송 전 장관은 문 후보가 그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 됐다고 주장하며 '달'이 아닌 '손가락' 전쟁에 직접 뛰어든 셈이다.
송 전 장관이 <빙하는 움직인다>를 썼을 때는 이 책을 내세워 '존경'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30여년간 분단 한반도의 외교현장을 누빈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정리하고 귀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잘 참고해서 후세에 보탬이 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역작을 썼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자서전 또는 회고록이라 함은 사관이 작성한 객관적 역사기록서가 아니다. 사관의 기록조차 객관적인지 항상 논란이 있다. 자서전에서 낱낱의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했다고 인정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저자의 욕심이 지나친 것이다.
자서전은 늘 논란의 대상이 된다. 미국 조야의 유명 자서전이 모두 그렇다. 자서전의 한줄, 한획도 '팩트'라며 나서는 것은 어쩌면 오만이다. 그에 대한 논란은 독자들과 외교안보를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현명하다. 당시 북 인권결의안에 대한 기권 과정은 송 전 장관의 주장도 옳고 문 후보 주장도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논쟁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로 주장해도 진실게임처럼 소모적 논란만 커질뿐이고 NLL대화록 재판이 될 공산이 높다.
특히 지금이 어느때인가. 초유의 탄핵심판으로 국정은 공백 상태이고 한국은 미.중 열강의 세력 다툼안에서 '무주공산' 같은 처지가 돼버렸다. 미국과 중국, 일본은 한국을 우습게 건너 뛰는 모양이 너무도 역력하다. 한반도 위에서 미.중이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지나친 기우인가. 여기에 예측하기 힘든 김정은의 북한은 6번째 핵실험을 도발할 태세다.
이런 중차대한 시점은 무엇보다 외교안보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송 전 장관과 같은 사회적 무게를 가진 인사가 유력 대선 후보를 상대로 '팩트'를 따지고 나섬으로써 검증 이상의 소모적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시기가 적절한 지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 문 후보, '감정싸움' 말고 대승적 차원에서 10년 전 문제 경험 발판삼아야
문재인 후보측도 송 전 장관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발언과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또 이번 사태에 대해 형사고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도 너무 나간 것이다.
특히 문 후보측에서 "송 장관이 특정 대선 후보측과 연관이 깊다"라는 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정말 '팩트'를 갖고 하는 건지 자문해 봐야 한다. 송 전 장관이 세력을 형성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아는 사람이면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이것은 송 전 장관의 인격과 명예를 더 훼손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문 후보의 "책임을 묻겠다"는 식의 '윽박성 발언'도 유력 후보의 '협박'으로 들린다. 또 상대방에게 토론 기회를 봉쇄하겠다는 '으름장'으로 오해 될 수 있다.
문 후보측은 이번 논란이 오히려 기회라는 인식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당시 송 전 장관은 뉴욕 유엔대사관을 통해 북한의 동향을 파악한 뒤 "결의안에 찬성해도 북한이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것"이라며 찬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외교부를 제외한 이재정 통일부 장관 등 국내 외교안보팀은 '그럴리가 없다'라는 의문을 갖고 '그러면 크로스체크를 해보자'는 취지로 북측 의사를 타진해본 것으로 보인다. 송 전 장관이 공개한 백종천 당시 안보실장으로부터 받았다는 문건을 보면 북한 입장이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뉴욕 외교라인과 대북 라인을 통해 알아보는 것은 하자가 없다. 관행상 알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아보냐가 또한 중요하다. 즉 가볍게 타진하거나 살짝 찔러 헤아려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정확해야 한다. 아전인수식으로 정보를 해석하면 안된다.
문 후보가 당시 남북상황과 결정 과정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밝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국가기밀이라고 뒤에 숨지 말고 당시 정세와 상황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송 전 장관의 입장을 뒷받침 해주면 된다. 말꼬리를 잡아 책임져야 한다는식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이 문제는 사실 회고록이 출간된 작년 10월에 종식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문 후보가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실기하고 말았다. 문 후보는 "기억이 안난다"며 머뭇거렸고 이재정 전 장관 등이 나섰지만 되레 논란은 증폭됐다. 이번에 형사책임을 묻겠다는 것도 국민을 설득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색깔론을 울타리로 써먹는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10년전 당시 유엔에서 우리가 기권을 했든 찬성을 했든 돌아보면 그 이후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이나 여파가 미치지 않은 사안이다. 당시에는 중요했겠지만, 어차피 남북관계는 지난 10년간 파탄상태로 변했다.
북한 인권이라는 10년전 문제를 갖고 문 후보가 진실게임 공방으로 끌고 가는 것은 현명치 못한 행위다. 대승적 차원에서 그 경험을 발판삼아 그 당시 부족했던 것이 있었다면 그때 상황 논리를 지금의 눈에서 보는 것을 찬성할 수 없더라도 하여튼 '국민의 목소리를 유념하겠다'며 뛰어 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북관계는 복잡하고 어렵고 누가 집권하든 도전적인 사안이다. 문 후보는 이번 사안을 과거의 경험을 극복하고 통합해서 남북문제를 잘 관리하는 디딤돌로 어떻게 만들것인지를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상대방을 공격하고 사실을 감추려거나 주저할 사안이 아니다. 작금의 현실은 10년 전 대북 인권 문제로 대선 외교안보 이슈를 블랙홀로 만들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