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자 부모의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통증은 영원히 치유 불가
- 세월호는 이제 3년 밖에 안 된, 너무나 뜨거운 상처
- 노란 리본을 달아주는 것이 공감과 연대의 상징
- "죽고 싶다가도 옆 사람 가방의 노란 리본 보면 살아야지, 생각 들어"
- 세월호 세대 '치유 다큐멘터리'도 제작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7년 04월 14일 (금)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정혜신 박사(심리치유공간 '이웃', 정신과 전문의)
◇ 정관용> 세월호 참사 3주년 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립니다. 우선 내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퇴진행동이 주최하는 촛불집회가 열리고요.
안산에서는 16일 오전부터 김제동과 함께하는 전국청소년만인공동회가 열리고. 1시에는 세월호 참사 3년 안산봄길행진 또 3시에는 합동분향소에서 세월호 참사 3년 기억식이 열린다고 합니다.
목포신항에서는 대규모 행사는 자제하고 종교행사만 열릴 예정이라고 하고요.
3년이 흘렀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또 해야 할 일은 뭘까 생각해 보는 시간 가지려고 하는데 오늘 초대한 분은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입니다. 직접 안산으로 이사까지 가셔서 ‘심리치유공간 이웃’을 열어서 그 지역주민들과 함께하셨던 분이죠. 정혜신 박사, 어서 오십시오.
◆ 정혜신> 안녕하세요.
◇ 정관용> 지금도 안산 사세요?
◆ 정혜신> 아니요. 안산에서 첫 2년 지냈고요. 지금은 저희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형태로 '치유공간 이웃'에 있죠.
◇ 정관용> 치유공간 이웃은 운영이 되고?
◆ 정혜신> 그럼요.
◇ 정관용> 아예 이사까지 가실 생각은 어떻게 하시게 됐었어요, 그때?
◆ 정혜신> 계획한 건 아니고요. 진도 팽목항에 그때 4월 20일쯤에 갔는데 그때 갔다가 신원확인소라고요, 아이들이 뭍으로 올라오면 시신을 수습하는 장소가 있었는데요. 거기 있다가 아이들 너무 많이 봤네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무조건 가야 저도 살고, 저도 살 수가 있었고 가서 뭐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하던 일을 아주 급하게 다 정리를 한 거죠.
◇ 정관용> 가서 뭐 하셨어요, 그러니까.
◆ 정혜신> 처음에는 가서 생존 학생 아이들이 학교로 복귀하지 못하고 중소기업연수원이라는 곳에 같이 머물러 있었어요. 뭍으로 올라와서 학교로는 복귀를 못하고 거기 있을 때 아이들이 학교로 복귀하는 과정을 조금 돕는 일을 학교의 요청으로 거기에서 같이 묵으면서 거기에서 좀 했고요.
그때 단원고 아이들을 돌보던 선생님들. 그러니까 그분들도 말자면 트라우마 피해자죠. 동료들을 10명을 잃었고 제자들을 잃었고. 그러면서 생존 학생들을 또 아이들을 도와서 걔네들을 또 이끌어야 되고.
그래서 그 선생님들의 심리적인 공황 상태가 아주 심각했었고요. 그래서 그때는 그 일 하다가 그 이후에는 ‘치유공간 이웃’ 만들어서 유가족들과 같이 지내고 그리고 또 다음에는 민간잠수사들 상담하는 일하고 이렇게, 이렇게 지금까지 왔네요.
◇ 정관용>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요, 이게. 치유될 수가 없는 일인데. 그렇잖아요. 이제 3년쯤 흘렀습니다. 조금씩 그래도 진전이 있나요?
◆ 정혜신> 트라우마라는 것은 치유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요, 치유가 되는 영역이 있고 그러니까 이것이 조금 나누어지죠. 그러니까 치유가 되지 않는 영역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치유가 가능한 부분에 뭔가 역할을 하려고 간 거죠.
치유가 되지 않는 영역이라는 건 이를테면 유가족들이, 그러니까 엄마 아빠들이, 내 아이에 대한 그리움, 내 아이들을 생각하면 못 보는 것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 통증, 이런 것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건 세월이 지나도 옅어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엄마가 눈을 감아야 끝나는 고통. 그건 치유의 대상이 아니고요. 그건 치유가 안 되는 거고. 그런 상황을 견디면서 이제 살아나가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런 상황으로 된 거잖아요. 그러면서 겪는 여러 가지 혼돈과 여러 가지 감정들이 있죠. 그것을 돕는 과정이 치유라고 볼 수 있어요.
◇ 정관용> 조금씩들 힘을 내십니까?
◆ 정혜신> 힘을 낸다기보다 혼돈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건데 오히려 고통이나 이런 것은 더 또렷해지죠. 초기의 고통은 그냥 혼돈 그 자체. 내가 갑자기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숨을 어떻게 쉬었는지도 모르겠고.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예전 같았으면 뭘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일상이 한 순간, 순간이 혼돈이었는데요. 오히려 그런 혼돈이 조금씩 지나면서 사라지죠.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사라지기도 하고. 그런데 그러다 보면 오히려 고통이 더 또렷해지는 거죠.
혼돈으로 인한 고통은 없으나 굉장히 분명하고 또렷한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되는 삶이 남아 있는 거죠.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여러 가지 과정들이 그런 것들이 남아 있는 거죠.
◇ 정관용> 그래서 그나마 하루하루 좀 버티고 사시다가도 4월 달만 되면 이제 4월 16일이 다가오면뿐이겠어요. 아이의 생일날이 오고 이러면 또 더 심해지시죠, 더 어려워지고.
◆ 정혜신> 그럼요. 아이의 생일이 오면 그리고 4월이 오면 엄마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데요. 그래서 5월의 광주는 지금 30여 년이 지났는데 5월이 되기 전에 한두 달 되기 전부터 그 5월의 피해자들 또 그 가족들은 이렇게 앓아요. 그래서 입원을 하고 이런 분들이 3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하거든요.
전두환 자서전이 나오고 회고록이 나오고 전두환이 화면에 보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앓기 시작해요. 막 분노와 그 상처가 다시 이렇게 헤집어지죠.
그런데 이건 세월호라는 건 지금 3년밖에 안 된 상처잖아요. 너무나 뜨거운 상처이고 4월이 되면 엄마들은 다 이렇게 그 이전부터 다 앓기 시작하고 병이 들기 시작하고 굉장히 그런 고통들이 심하죠.
◇ 정관용> 아이 생일날은요?
◆ 정혜신> 같죠.
◇ 정관용> 똑같아요?
그런데 보니까 그게 아이 생일 전이면 그래요. 작년에 또 그 이전에는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데 그런 생각들이 자꾸 나서 그래서 아이 생일날 하는 굉장히 중요한 치유프로그램이 있고 그렇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또 그 생일을 넘기고. 그다음 해 생일이 그렇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런 것들을 하고 그러죠.
◇ 정관용> 생일모임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으로 진행이 됩니까? 그러니까 같은 엄마들이 이렇게 축하해 주고 이러는 거예요, 뭐예요?
◆ 정혜신> 축하는 아니죠. 생일날 그 아이의, 희생 학생의 생일날 주인공이 없는 생일모임인 거죠. 그런데 주인공은 없지만 그 아이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싹 다 모이죠. 그러니까 엄마, 아빠, 형제자매들. 그리고 친척이 있을 수 있고.
◇ 정관용> 친구들도?
◆ 정혜신> 친구들이 아주 많이 오고요. 그렇게 해서 한 한 달 전부터 이웃의 자원봉사자를 우리는 이웃 치유자라고 하는데요. 그분들이랑 같이 이제 저랑 엄마도 만나서 얘기하고 아빠한테도 얘기를 듣고 그 아이에 대한 그 아이가 한 17년~18년을 살았지만 한 사람의 생애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요.
그 친구들을 만나고 그래서 그 아이가 어떻게 놀았는지, 뭘 잘했는지, 성품이 어땠는지 여러 얘기를 들어서 그것들을 다 모아서 모았다가 그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서 그 아이 얘기만 한 3시간을 하는 거예요.
◇ 정관용> 기억모임이군요, 기억모임.
◆ 정혜신> 그렇죠. 그리고 그 아이가 좋아했던 음식을 준비해서 또 같이 나누고 이런 건데. 엄마들이 자기 아이가 친구들이 기억하는 것은 부모들이 잘, 부모들이 모르는 얘기를 친구들은 알잖아요.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으니까.
그런 얘기를 듣고 그러면서 내 아이가 친구들 기억 속에, 친구들 마음속에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구나,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이러면서 훨씬 위로를 받고요.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 살아남아 있는 친구나 그런 아이들이 뭐랄까. 부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괜히 마음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거든요.
◆ 정혜신> 하지만 저 아이 마음속에도 내 아이가 살아 있구나, 이런 걸 확인하는..
◆ 정혜신> 그렇죠. 그래서 그 아이하고 관계가 굉장히 좋아져요. 그러다 보니까 친구 입장에서는 자기 친구 부모님한테 자기가 위로가 됐고 자기가 한 얘기 때문에 또 이렇게 좋아하시고 이런 걸 보면서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 같은 게 있잖아요.
◇ 정관용> 그걸 또 극복해가는 거군요.
◆ 정혜신> 네. 그런 과정이죠.
◇ 정관용> 이번에는 세월호 공감프로젝트라는 걸 시작하신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그러니까 이 엄마, 아빠, 부모세대가 아니라 그 생존 학생들..
◆ 정혜신> 생존 학생 아니고 그러니까 희생 학생들의 친구들이죠.
◇ 정관용> 그러니까 주로 생존 학생들일 수도 있고.
◆ 정혜신> 생존 학생들은 조금 제외해요.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따로 치료를..
◇ 정관용> 따로 치료해야 됩니까?
◆ 정혜신> 개별적인 치유를 따로 해야 하니까.
◇ 정관용> 아 그렇겠군요. 그러면 그 죽은 아이들의 친구들.
◆ 정혜신> 그렇죠. 중학교 동창들이 많고요. 한 동네에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아이들.
◇ 정관용> 그리고 또?
◆ 정혜신> 그런 아이들이에요. 교회 친구 또 성당을 같이 다녔던 친구, 학원 같이 다녔던 친구, 중학교 동창들, 이렇게 절친들을 여럿 잃은 아이들이 안산에는 굉장히 많거든요.
◇ 정관용> 그렇죠. 1명이 아닐 수도 있고.
◆ 정혜신> 1명이 아니죠. 친구 또 형제자매.
◆ 정혜신> 형제자매들도 있고요.
◇ 정관용> 어떻게 하는 겁니까, 공감 프로젝트?
◆ 정혜신> 그건 그러니까 세월호 세대라고 하는 또래 집단을 또 모았고요. 세월호 고통의 상처에 공감하고 슬퍼하고 자기 문제 같이 받아들이는 이런 그냥 일반 학생들의 신청을 받고 그리고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친구들이 있잖아요. 그 친구들의 얘기를 이 또래세대들이 같이 깊이 공감하면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장을 마련한 거죠. 제가 역할을 해서 제가 중간에서 그 친구들, 아이들의 내면의 상처들을 이렇게 잘 끌어내고.
◇ 정관용> 끌어내고.
◆ 정혜신> 그러면 그 상처를 또래아이들이 같이 들어주고 같이 공감하고 같이 눈물 흘리고 그러면서 서로 이렇게, 이렇게 공감을 하면서 주고받는 과정인 거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지금 다 마쳤는데요, 이 두 집단이 서로서로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친구들이 어떤 치유의 한 모델을 만들고 싶어서 한 거죠. 그런데 그게 한두 명의 전문가가 그냥 상담을 하거나 이런 게 아니라 또래끼리 상호작용을 통해서 치유가 되는 것을 좀 우리가 같이 많이 알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것을 조금..
◇ 정관용> 또래들 간의 집단 상담을 통해.
◆ 정혜신> 서로가 서로한테 치유자가 되는 과정이죠.
◇ 정관용>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으셨다고요?
◆ 정혜신> 그 다큐멘터리는 말하자면 알약 같은 거죠. 왜냐하면 또래 희생 학생 친구들은 안산에 지금 너무나 많아서요. 제가 일일이 할 수도 없고.
◇ 정관용> 그 프로젝트에 참여 안한 학생들도 많고.
◆ 정혜신> 너무 많고. 다큐를 보면 치유의 원리나 이 과정을 어른들도 그렇고 보면 알죠.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것이 치유구나.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이런 것들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든 치유 다큐죠.
◇ 정관용> 어찌 보면 다 상처받은 사람들이잖아요.
◆ 정혜신> 그렇죠.
◇ 정관용> 그런데 서로 상처받았는데 서로가 남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다. 이게 참 의미가 있겠는데요.
◆ 정혜신> 그러니까 치유자 중에 최고의 치유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 그러죠. 자기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자기 상처를 치유받는 경험을 통해서 결국은 치유라는 게 이런 거구나, 내 마음이 이렇게 만져지니까 이게 좋아지는구나, 이것을 안 사람이 결국 누구한테 최고의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게 치유의 원리죠.
◇ 정관용> 또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도 치유가 되는 거고.
◆ 정혜신> 그렇죠.
◇ 정관용> 단원고 학생 또 인근 학교 학생들로 청소년 중창단을 만들어서 세월호 생존 학생이 지휘해서 추모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이 노래를 부르는 행사도 3주년 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의 의미는 뭡니까?
◆ 정혜신> 아이들이 세상과 사람들에 너무 상처를 많이 입고 세월호 상처에 대해서 세상이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있어서 3년 동안 거의 고립돼서 지내온 거예요. 그런 아이들이 너무 많거든요. 생존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거죠.
그래서 그 아이들이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어쨌든 이런 어떤 계기에 세상에 자기를 조금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그 과정도 상당히 의미 있고 그것의 결과로 그 아이들이 우뚝서서 자기 또래들하고 자기의 상처를 그냥 인정하고 내놓은 채로 소통을 할 수 있는 이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봐야죠.
◇ 정관용> 이런 일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되겠군요.
◆ 정혜신> 그게 사회적 치유의 과정이죠.
◇ 정관용> 오늘 정혜신 박사님 제가 초대해서 소개하면서 3년이 벌써 흘렀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뭘까, 생각해 보기 위해 이렇게 소개했거든요. 이 방송 들으시면 청취자 분들 우리 일반 국민들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어떤 겁니까?
◆ 정혜신> 여전히 세월호 얘기만 들으면 세월호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만 보면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고 너무 고통스럽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분들이 주변에 너무 많으세요. 눈물과 기도와 공감, 이것이 저는 공화국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하고요.
기억을 해 주는 것, 이것이 의무이고 그것이 결국은 피해자들한테도 가장 큰 치유죠. 그래서 그것의 어떤 한 작은 상징으로 저는 세월호 노란리본이 있잖아요. 리본을 달아주는 것이 공감과 연대의 어떤 상징이고 내 표시이기도 하고 그것이 사실은 피해자나 같이 연대를 하고 공감을 하는 사람한테 세상에 저런 사람들이 아직도 저렇게 많구나라는 확인이 결국은 치유의 아주 기본적인 근간, 기반이 되는 거죠.
그래서 공감과 기억의 의무, 그것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그것이 굉장한 위로가 된 거예요. 서로가 서로한테.
◇ 정관용> 어떤 유가족분이 막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른 사람 가방에 노란리본 매달린 걸 보면 살아야지, 이런 생각이 든다고...
◆ 정혜신> 그런 얘기를 무척 많이 해요, 유가족들이.
◇ 정관용> 저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기억이 있거든요. 그렇죠. 우리는 노란리본 달기를 통해 공감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알겠습니다. 오늘 나오셔서 감사드립니다.
◆ 정혜신> 고맙습니다.
◇ 정관용> 정혜신 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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