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연애·결혼 중인데도 연인이 떠날까봐 불안하신가요?
② 벽 밀치기, 강제키스, 폭언…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계속>
#2. 호텔 방에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만 있는 상황. 남자주인공이 "자고 싶은 거 아니면 지금 말해. 문 열어줄게"라고 말하자, 여자주인공은 "나 안 나갈 거야.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 네 옆에 있을 거야"라고 답한다. 여자주인공을 침대에 눕히고 덮칠 듯한 자세로 옷 지퍼를 내린다.
위에 나타난 예시는 각각 2006년 방송된 드라마 '궁'과 2016년 방송된 '함부로 애틋하게'의 한 장면이다. 데이트폭력, 데이트강간으로 볼 수 있는 행위지만, 드라마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갈등' 정도로만 건드린다. 이럴 때는 꼭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악까지 흐른다. 10년이 지났지만 트렌디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클리셰 같은 장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선영 TV평론가는 7일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3번째 강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멜로드라마 속 데이트폭력과 대안적 연애'를 주제로, 드라마 속에서 데이트폭력이 어떻게 미화 혹은 은폐되는지를 살폈다.
◇ 1990년대, 2000년대의 '전형적' 캐릭터들
김 평론가는 트렌디 멜로드라마를 '유행에 민감한 젊은 시청자 층을 대상으로 하는, 로맨스가 핵심인 드라마'라고 설명했다. 굉장히 감각적인 연출 기법을 동원해 연애의 전 과정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이런 드라마에서 나오는 데이트폭력 씬은 화제성과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을 짚었다.
극중에서 데이트폭력을 행하는 위치는 남성이고 이를 감수하는 쪽은 여성인 만큼, 드라마 속 데이트폭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대별 남자주인공 캐릭터의 특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87 민주화 항쟁을 거친 이후였던 1990년대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남성 캐릭터들이 나타났다. 세련된 매너, 부드러운 성격, 잘생긴 외모와 몸매 등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남자주인공'의 예로는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강풍호(차인표 분), '별은 내 가슴에'의 강민(안재욱 분), '느낌'의 3형제 빈(손지창 분), 현(김민종 분), 준(이정재 분) 등이다.
그러나 이때의 남자주인공도 '가부장'의 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김 평론가는 "폭력적인 가부장 대신, 세련되고 온화한 얼굴의 가부장의 모습을 보인다"며 "여성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출하고 보호하는 장면이 굉장히 영웅적인 연출과 함께 등장하는데,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라는 폭풍우가 지나간 2000년대에는 보다 직접적인 의미의 '나쁜 남자'들이 탄생했다.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하고자 했던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는 다시금 '청순가련형'으로 퇴행했다.
'명랑소녀 성공기'(2002), '풀하우스'(2003), '파리의 연인'(2004), '궁'(2006), '꽃보다 남자'(2009), '파스타'(2010), '시크릿 가든'(2010) 등 숱한 히트작들이 '까칠한데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 남자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를 펼쳤다.
김 평론가는 "여자주인공들이 닭대가리, 돼지토끼, 붕어, 애기, 서민 등 폭력적 별칭으로 불린다"며 "(남녀의) 사회적인 위치와 간극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계약관계로 이루어진 커플이 많다"고 말했다.
◇ 2010년대, '나쁜 남자' 서사에 균열이 일어나다
김 평론가는 2010년대가 심각한 여성혐오를 보이는 '일베'의 성행에도 역설적으로 여성주의적 작품이 등장한 시기라고 보았다. '아내의 자격'(2012)은 전업주부 여성들의 노동을 경시하는 세태를 꼬집었고, '직장의 신'(2013)은 비가시적이었던 여성의 노동 문제를 전면에 드러냈다.
'치즈 인 더 트랩'(2016)에는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을 지닌 남자주인공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나쁜남자 판타지 뒤의 '공포'를 바라보는 여자주인공이 나오며, '청춘시대'(2016)에는 아예 데이트폭력의 피해자가 등장해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 참신한 관점으로 '연애'의 다른 면 보여준 드라마들
최근 대안적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인 신호다. 김 평론가는 특히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추천했다.
'괜찮아, 사랑이야'(2014)에는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지만 각자의 상처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으로 둔 남녀 주인공이 나온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뭔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 해 내는 거야"라는 대사는 '노희경 로맨스'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나이도 관계도 다양한 노년들이 극을 이끌고 가는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이성애를 중심으로 다루면서도, 이성애를 넘어서는 여성들 간의 뜨거운 연대 등 다양한 관계를 담아냈다.
김 평론가는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매체비평을 하는 이유는, 기존과는 다르게 매체를 바라보자는 의미"라며 "애정을 갖고 재미있게 (드라마를) 보시되, 어떤 표현들이 너무 문제의식 없이 클리셰로 굳어지지 않나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