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강원 속초 출생인 황금찬 시인은 일본 다이도(大同)학원 유학 이후 강릉농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1948년 월간 '새사람'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강릉에서 '청포도' 동인을 결성했고 이듬해 청록파 시인 박목월(1915~1978)의 추천을 받아 '문예'로 등단했다. 올해로 시력 66년째였다.
1965년 '현장'을 시작으로 '오월나무'(1969), '나비와 분수'(1971), '오후의 한강'(1973), '추억은 눈을 감지 않는다'(2013) 등 39권의 시집을 펴냈다. 시인은 마흔 번째 시집을 엮어내는 게 소원이라며 말년까지 작품활동을 했다고 제자와 유족이 전했다.
시인은 향토적 정서나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서정시부터 현실에 대한 지적 성찰이 담긴 작품까지 8천 편이 넘는 시와 수필을 썼다. 가난에 허덕이던 겨레의 슬픔을 형상화한 '보릿고개'가 널리 읽혔다.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고인은 양양의 시비에도 새겨진 '별과 고기'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먹지만/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떠 있다."
'동해안 시인'으로 불린 고인은 오랫동안 해변시인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재작년에는 시인의 업적을 기리는 황금찬문학상이 제정됐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제자와 후배 문인들이 그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대하기 위한 위원회를 꾸리기도 했다.
월탄문학상·한국기독교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한민국예술원상·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도정·도원·애경 씨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0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1일. 장지는 경기도 안성 초동교회묘지. ☎ 02-2258-5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