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병원 피부과에서)
명의: 유경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니탓환: 의사선생님, 이무기와 오랫동안 동침하다 보니 제 몸에 비늘이 돋나 봐요. 자고 나면 침대 시트에 허연 비늘이 수북이 떨어져 있어요.
명의: 그 이무기와는 몇 년 동안이나 동침을 하셨죠?
니탓환: 올해로 34년째지요. 혹시, 제 몸도 이무기로 변종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생님, 무서워요.
명의: 유경님, 목욕은 언제 하셨죠?
니탓환: 달포 전쯤에요.
명의: 살비듬이에요, 살갗 껍질요. 아무 염려 마시고 가서 따뜻한 물로 자주 목욕을 하세요, 그것도 전신욕으로요. 본디 허물 많은 인간이 허물을 많이 벗죠. 매일매일하라구요, 그 허물 벗기기를……
-128~129쪽
유경숙 작가의'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는 짧은 엽편소설 60편의 모음집이다. 흔히 '콩트'로 분류되곤 하는 짤막한 이야기들을 접한 독자들은 뒤통수 치는 반전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유 작가의 엽편소설은 반전보다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게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1부 유랑자들'에서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기이한 크메르 노인에서부터 독수리 사냥꾼 베르쿠치에 이르기까지 광야의 유랑자들이 등장한다. '2부 술의 시간'에서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무를 꾸짖으며 홀로 술을 마시는 월하독작가와 번개 맞은 대추나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최씨의 이야기 등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3부 고요를 깨뜨리는 소소한 옛이야기'에서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의 재발견과 재구성이 돋보이며 '4부 탱자나무집 계집애'에서는 작가의 현재 모습을 짐작케 하는 진솔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5부 증미산 사람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필부필녀(匹夫匹婦)들의 단면들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6부 별종들'에서는 세상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먹물들을 예리하게 꼬집으며 우리가 한 번쯤은 보게 되는 별종 아닌 별종들의 이야기를 펼친다. '7부 천지자연이 나의 스승'에서는 자연을 사랑하고 따뜻하게 보살피려는 작가의 선한 품성과 섬세한 관찰력을 엿볼 수 있다.
작가 유경숙의 소재는 중세의 풍류 시인처럼 무궁무진하다. 그의 문장들은 능청스러워서 더 정겹다. 그의 소설에서 ‘제 속에서 나온 살붙이라고 서너 달 동안 살살 달래고 어른, 꽃샘추위에 아린을 비집고 나온 자목련 꽃잎처럼 여리디 여린 놈’은 치질이고(「속살」), ‘평생을 암수 놈이 한 몸으로 붙어서 똥구멍 맞추고 사는 족속들’은 민달팽이이다.(「자웅동체」) 남자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한 여자가 ‘남자를 무거운 석관에 집어넣고 열쇠를 채워 우주 밖으로 내던지기도 했고 지독한 우울증에 걸리게 해서 북해로 흘러드는 라인강에 빠뜨리기도’ (「침낭 속의 남자」) 했다는 부분을 읽을 때는 비장해지기 전에 웃음이 먼저 터진다.
책 속으로
먹물꽃(전문)
나, 연꽃을 보았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피어난 연꽃 말고
먹물을 거름으로 해서 피어난 연꽃.
그대는 먹물들의 분탕질 늪을 벗어나 홀로 피어 있는 청아한 연꽃이었지.
만년 시간강사로 뛰면서도 늘 최선을 다하는 Ryu박!
-195쪽
유경숙 지음 | 푸른사상 | 247쪽 | 13,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