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창조적인 '제3'의 공간 찾는 경계인 되고파"

'불타는 얼음: 경계인 송두율의 자전적 에세이'

송두율 교수가 자전적 에세이 '불타는 얼음'을 펴냈다. 14년 전, 그는 37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구속되어 9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그후 독일로 돌아가 살면서 그 때의 한국의 광기와 야만이 여전함에 실망했으나 지난 연말 촛불 혁명에 다시금 기대를 품게 된다.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경계도시2'(송 교수의 귀향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반응을 보여주는데 촛점을 맞춤)는, 야만적인 '국가보안법'에 갇힌 한국 사회를 고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한 자기성찰을 호소하려 했지만, 그 후에 보여 준 한국 사회의 모습은 사실 오랫동안 내 희망을 옥죄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살아나듯이 2016년 말에 연인원 1천만 명이 지핀 '촛불 혁명'의 빛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까지 와닿았다. 이번에 맞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좋은 결과로 이어져 다시는 그 같은 야만과 광기, 그리고 부끄러움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289쪽)

송 교수는 경계인을 자처하며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의 선택이 아니라 제 3의 방안을 모색해왔다. 그것은 2002년 '경계인의 사색:재독 철학자 송두율의 분단 시대 세상읽기' 출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경계인' 은 2003년 공안몰이에서 송 교수를 '남북에 양다리를 걸친 기회주의자'로 매도 당하는 빌미가 된다.

그는 1심 결심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경계인의 통일 철학을 펼친다. 이 최후진술에서 조직 사회학에서 종종 거론되는 다섯마리 원숭이에 대한 우화를 소개한다. 원숭이 사육사가 신선한 바나나를 나무에 걸고 그 근처에 전류를 통하게 하자, 첫 번째 원숭이가 바나나를 따먹으려고 나무에 오르다가 전기에 놀라 포기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원숭이도 전기에 놀라 포기했다. 이튿날 새롭게 들어온 원숭이가 바나나를 보고 나무에 오르려고 하자 네 마리 원숭이가 말린다. 그러나 이 다섯 번째 원숭이는 이 만류를 뿌리쳤다. 사육사가 이미 전류를 끊었는데도 네 마리 원숭이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즉, '지식은 조직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항상 깨어 있게 하는 지식은 기존의 선입견을 파괴하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이른 바 '달리 생각히는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국가보안법'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국가정보원과 공안 검찰 및 이른바 거대 언론, 그리고 이에 덧붙여 기존의 선입견을 '지식'으로 포장하고 확대 재생산시켜온 이른바 '지식인들'이 바로 위에서 지적한 네 마리 원숭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이 사회를 항상 깨어 있게 만드는 많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번째 원숭이는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니 '말 바꾸는 지식인'이라고 저를 매도하는 네 마리의 원숭이가 벌이는 그 시끄러운 굿판 속에서도 달리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232-233쪽)

송 교수 구속 사건은 독일 사회와 국제사면위원회 등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과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하버마스 교수는 2003년 12월 22일 이대경 판사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문제의 핵심은 남한의 국내 정치적 갈등이 나를 '놀이공'으로 만들고 있다고 정확하게 짚으면서, 민주적 법치국가의 수준에 걸맞은 공정한 판결을 촉구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도 2004년 1월 6일 판사 앞으로 보낸 공개서한에서, 독일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저작활동을 문제 삼아 처벌하려는 비민주족 처사가 종식되고 '말의 자유'가 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판결을 기대한다고 썼다."(238쪽)

송 교수 구속 사건을 계기로 형사소송법상 피의자 권리 두 가지가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모든 피의자는 변호인의 조력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피의자를 심문할 때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결박하는 관행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가 독일로 돌아온 뒤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에서 번진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의 위기를 넘기고,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역설했고, 탄핵 역풍에 힘입어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국회 의석을 과반수를 차지했음에도 뿌리 깊은 반공 의식과 기회주의 탓에 '국가보안법' 철폐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때 검찰의 공안통들이 몰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 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승승장구해 국무총리 등을 비롯한 요직에 등용되어 화려하게 부활했으니, 역사와 사회가 거꾸로 간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200쪽)

그럼에도 경계인 송두율은 희망을 꺾지 않는다.

"내가 경계인으로서 37년 만에 귀국했을 때 경험한, '종북'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야만과 광기는 여전하지만 나는 그래도 언젠가는 경계인이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실질적 힘이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372쪽)

그러면서 그는 창조적인 '제 3'의 공간 찾는 경계인 되고자 한다.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꽉 막힌 오늘날의 한반도는, 남에서 북을 발견하고 북에서 남을 발견할 수 있는 창조적인 '제3'의 공간이 없다면 하나의 거대한 '출구 없는 방'일 뿐이다. 이 '제3'의 공간을 찾고자 '경계인'들이 모여 '집단적 단수'인 경계인이 될 때, 남북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이럴 때 '경계인' 송두율도 그런 경계인의 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오랫동안 기다리는 바로 그 '고도'이다."

송두율 교수의 이 자전적 에세이는 그와 고통을 함께 해온 아내, 두 아들 간 뜨거운 가족애와 뜻을 함께 해온 그의 국내외 지식인· 민주 인사들과의 끈끈한 동지애, 그리고 그의 철학 ·사회학 등 사상적 깊이와 시· 음악 등 예술적 서정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책 속으로

독일의 철학자 한스 파이힝거는 '가정의 철학'에서 우리의 지식·종교·예술 또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많은 경우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쓸모 있는 허구'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직 모르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듯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두 세계를 비교하는 가운데 생기는 긴장이 삶의 지평을 좀 더 넓힐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완전한 심미적 세계를 전제하고 이를 긴장 속에서 추구했다는 의미에서 말러의 교향곡 4번을 아도르노는 그렇게 평했던 것 같다. 나는 답답하거나 심란할 때 마음의 평정을 찾고자 가끔 이 곡을 듣는다. (171쪽)

황장엽의 망명이 몰고 온 충격파의 첫 번째 대상이었던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그의 망명 동기에 관심이 갔다(황씨는 송 교수가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며, 이같은 사실을 대남 담당 비서 김용순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재판부는 황 씨의 주장이 어떤 증거에도 근거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김주석이 사망한 뒤 점차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진 황장엽을 측근에서 보좌했던 김덕홍이 안기부의 미끼를 처음 물었고, 황장엽도 결국 걸려들었다. 김영삼 정부 집권 당시, 김영상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한보 사태'로 궁지에 몰린 '김현철 게이트'가 터지자 안기부를 통해 이를 황장엽 사건으로 덮으로 했다는 것이 내가 보는 황장엽 망명 사건의 큰 줄거리다.(161쪽)

송두율 지음 | 후마니타스 | 396쪽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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