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는 김건모를 비추던 카메라는, 이어 그의 뒤편에 자리잡은 책장을 훑기 시작했다.
제작진은 시청자들에게 김건모의 색다른 면모를 전하려는 듯 '중국고대사상사론' '세계철학사' 등의 제목을 단 인문서적들에 빨간 테두리를 넣어 강조했다.
문제는 다음 장면이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책'이라는 자막과 함께, 화면 속 빨간 테두리는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이라는 책을 잡아냈다. 이때 음향은 MC들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강조하면서 미리 녹음된 관객들의 웃음소리 효과까지 더해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는 맥락상 '혼자 사는 남성인 김건모가 남몰래 서재에 틀어박혀, 책으로 성 지식을 얻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곧 이어 카메라는 스튜디오에 있는 김건모 어머니의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담으면서 '부끄 부끄'라는 자막을 넣어 이러한 메시지를 더욱 굳혔다.
하지만 제작진이 이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혼자 사는 남성' 김건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해 버린 이러한 장면은 아마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을 읽었을 김건모의 특별한 감수성에 존중의 뜻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특히 남녀간의 관계만을 강요하는 '낭만적 사랑'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의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보다 다양한 주체들이 평등하게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이는 곧 민주주의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데서도 남다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을 한국에 소개한 새물결 출판사 측은 "꼭 거창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할지라도 얼마나 많은 여성의 삶이 사랑 앞에서 형편없이 좌절하고 연약해지고 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사랑 그 자체를 반추해볼 만한 틀거리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며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 남성이든 혹은 여성이든 간에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라고 전했다.
"현대성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후기 산업사회가 파생시킨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는 사람들, 특히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성에 관한 기묘한 담론에 지친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성에 접근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명저"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책을 지닌 김건모는 조롱의 대상이나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로 얼룩진 한국 사회에서, 그들을 향한 감수성을 키우려 애쓰는 시민의 면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1일 CBS노컷뉴스에 "단순히 책 제목만 보고 내용을 오인하는 것은 결국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로 다가온다"며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높은 시청률의 인기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에게 아쉬운 대목"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