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통령은 2015년 2월9일 수석비서관회의 때 "(정부가) 경제 활성화를 통해 경제도 살리고, 복지도 더 잘해보자는 뜻을 외면한다면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며 국회의 '복지 증세' 논의를 비난했다. 같은 해 6월25일 국무회의에서도 "당선 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국민들께서 심판해달라"면서 국회법 개정안을 '정부 발목잡기'로 규정한 채 비난했다.
본인이 내세운 국정기조에 대한 수정 논의는 모조리 배신이라는 국정기조다. 심지어 야당과 국회법 개정안을 합의 처리했다는 이유로, 여당 원내대표에게까지 배신자 낙인을 찍었다.
당시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으로서는 영애 시절 겪은 배신의 트라우마가 작용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선친의 피살 뒤 권력의 최정상에서 '몰락한 독재자'의 딸로 전락했다. 이때 접한 측근·참모들의 외면과 태도변화에 분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993년 출간한 자서전에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 사람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똑똑히 보았다"고, 2007년 자서전에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번 배신하고 나면 그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 살아가게 된다"고 적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자신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배신을, 국민에게 저지른 것으로 심판받았다. 지난 10일 헌법재판소는 그를 파면하면서 "최순실의 국정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관련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했다"며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진실이라는 말도 박 전 대통령이 반대파를 비난할 때 적극 활용한 어휘다. 그는 국회가 이른바 경제·민생법안 처리를 지연시키자 2015년 11월10일 국무회의에서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대국민 메시지를 냈다. 이는 이듬해 총선을 겨냥한 사전 선거운동으로 비판받았다.
2015년의 국회법 개정안 비난 때도 "진실이 무엇인지, (정치인들이)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지 (국민들은) 잘 알고 계실 것"(6월25일 국무회의)이라고 말했고, 취임 초인 2013년의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서도 "국민들도 진실을 벗어난 정치 공세에는 현혹되지 않을 정도로 민도가 높다"(10월31일 수석비서관회의)고 말했다.
화룡점정은 지난 12일 밤 삼성동 자택으로 이동한 뒤 내놓은 진실론이다. 박 전 대통령은 측근을 통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면서 헌재 선고에 대해 사실상 불복을 선언했다.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취임 선서를 한 그가 '헌법재판'의 결과를 '진실과 다르다'고 폄훼한 셈이다.
의도가 무엇이든 박 전 대통령의 선고 불복용 진실론도 본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가고 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순실게이트 연루 혐의 수사에 제대로 임하라는 야권의 집중공세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박 전 대통령 말처럼 진실을 밝히자. 검찰 수사와 재판을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고, 국민의당 주승용 원내대표는 "진실은 청와대가 아니라 검찰이 밝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바른정당도 논평에서 "명색이 전직 대통령인데 일부 지지세력에 정치적 선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탄했다.
14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도 신속 수사론을 개진했다. 그는 자유한국당 일각의 '대선 이후 수사' 주장에 대해 "그 발상이야말로 정치 재판을 하자는 얘기"라며 "헌법이든 법률이든 어디에, 정치적인 이유로 연기하는 게 가능하다고 나와있느냐"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