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군은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청소년 쉼터'에서 생활했다.
가출·위기청소년을 보호하는 곳인 청소년 쉼터는 기간에 따라 단기, 중장기쉼터 등으로 나뉜다. 아이들을 현장에서 발굴해 지원하거나 다른 기관으로 연계해주는 청소년드롭인센터도 있다. 성준군은 대한성공회 대전 나눔의집이 보건복지부와 대전시로부터 위탁·운영하는 대전청소년남자쉼터에서 두 달, 청소년드롭인센터를 거쳐 중장기쉼터에서 1년 6개월을 살았다.
집과 학교를 떠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성준군은 자신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맞지 않기 위해 공부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만점에서 0.5점씩 내려갈 때마다 한 대씩 맞았다"고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집을 나올 때까지 불안과 걱정을 놓지 못했어요." 도덕책과 다르게 굴러가는 학교도 속내를 털어놓거나 위안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집과 학교 모두 성준군의 울타리가 돼주지 못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세상은 혼자 나선 성준군에게 삭막하기만 했다.
"천안에 있는 사출공장에서 성형된 플라스틱 깎는 일을 하며 두 달 가까이 있었어요. 냉장고 안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곳에서도 지냈고요. 그런데 사장님이 월급을 안 주시는 거예요. 저는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다른 데를 가고 싶어도 청소년은 아르바이트로 잘 안 써주시더라고요."
막막하고 지쳤던 순간, 우연히 알게 된 곳이 청소년 쉼터였다. 청소년 상담기관을 통해 은행동에 있는 남자쉼터를 찾았다. 청소년들이 많이 오가는 한가운데 건물이 위치해, 처음에는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낯선 곳에 정을 붙이게 된 계기는 이곳에서 만난 연장흠 활동가의 '먹어, 먹어'라는 한마디였다.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해준 중장기쉼터 최종하 활동가의 말도 성준군은 지금껏 잊지 못한다.
"연장흠 선생님은 주중에 힘들게 일하시는 상황에서 주말에도 저희 요리해주러 쉼터에 나오셨어요. '어떻게 저 선생님은 본인도 힘드실 텐데 주말에 우리에게 요리해줄 생각을 하시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밖에 이성혁 팀장님, 야간에 일하셨던 이동엽·정구환 선생님, 드롭인 센터에 계셨던 정선영 소장님... 모두 제게 '따뜻한 세상'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신 분들이에요."
쉼터에서 배운 사랑은, 이후 일을 하며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입을 치르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됐다. 원서비가 없어 가장 가고 싶었던 지금의 대학 딱 한 곳에만 지원을 했다고 했다. 간절함은 통했다.
성준군이 품게 된 그 꿈은 '청소년 사회복지사'다. "제가 그동안 받은 것을 그분들께 다 갚는다는 것은 솔직히 어렵잖아요. 앞으로 제가 맡을 아이들에게 갚는 게 그분들께 갚는 거라고 생각해요. 힘들고 방황하는 친구들에게 제가 받았던 사랑을 주려고요. 꼭 이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