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번수, 가시 그림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하다!

'송번수_50년의 무언극',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미완의 면류관, 2002~2003, 모사, 평직, 302×298㎝
가시에서 탄생한 구원의 빛이 환하다. 실로 짠 그림(타피스트리)에서 그 구원의 빛은 절정에 이른다. 올해 74살의 송번수(1943~) 작가의 회고전은 가시로 꿰어지는 그의 독특하고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9일 개막한 '송번수_50년의 무언극'은 화가로서 표현 기법의 변화, 핵심 주제의 변주, 개인사 및 사회적 역사와 작품 세계와의 만남을 일관되면서도 풍부한 구성으로 보여준다.

송 작가의 작품 태도는 어떠한가. 그는 "작가란 본질적으로 시대의 기록자요, 감시자이고, 나아가 비판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확고한 작가관을 간직해 왔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말한다. "아티스트는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한 기법, 한 테마를 가지고 평생을 이끌어 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또 한 부류는 많은 테크닉과 그 시대성에 따라 달라지는 어떤 테마를 가지고 평생을 변화 속에서 진행하는 작가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두 작가군 모두 어떤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김미진 홍익대 교수와 인터뷰)

송 작가 자신의 말대로 후자의 예술가 부류인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많은 테크닉과 달라지는 테마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유독 가시와 타피스트리(섬유에 의한 회화작업)가 그의 작품 세계를 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그건 그의 관통하는 주제가 '가시'로 상징되고, 표현 기법 상으로는 타피스트리로 수렴되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의 자아, 1996, 모사, 평직, 235×277㎝
먼저 주제로서의 가시를 보자. 송 작가의 작품에는 가시에 앞서 장미가 등장한다. 1970년대에 그는 '장미의 작가'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작품 '수혈'(1975)에서 장미가 수혈 받는 장면, 그리고 작품 '매우 부드러운 식사'(1975)에서 장미가 식탁 위에서 포크와 나이프에 잘리는 장면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은유했다.

이후 1997년부터 장미는 줄기로만 등장한다. 그 해 파리 방문 때 퐁피두 센터 건물을 보면서 미술관 건축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고, 이 경험은 해탈 수준의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는 "그래서 그 당시부터 장미의 꽃은 없어지고, 줄기와 가시만 남게 됩니다. 가시를 주제로 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장미라는 꽃 보다는 가시라는 대유법이 나의 이야기를 훨씬 더 심도 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대상이 되었습니다."(김미진과 인터뷰)


가시를 표상한 작품들은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제목을 달리 한다. '가시', '기도' 연작 1-6, '십계명', '자신의 인생에서 가져보지 못한 순수성', '경험적인 진실', '절망과 가능성','예술가의 만찬', '그날 이후', '운명을 넘어서', '빛이 있으라 하심에 빛이 있었고','미완의 면류관', 네 자신을 알라'. 이들 가시 작품들은 두 작품을 제외하고 97년 이후 작품이다.

가시는 절망 속에서도 가능성을 상징한다. 흑백 대비의 천 뒤에서 가시가 뚫고 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절망과 가능성'(2005)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과 가능성'이라는 작품은 국가의 역사도, 세계사도 개인사도 '절망과 가능성'의 진폭 속에서 진행되고 종말을 맞게 된다는 저의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절망과 가능성'은 제가 상당히 사랑하는 주제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절망과 가능성'은 제가 앞으로도 다룰 것이고, 그 전부터도 다루어 왔고 제 인생에서 뺄 수 없는 주제입니다." (김미진과 인터뷰)

절망과 가능성, 2005, 모사, 평직, 201×202㎝
송번수의 가시는 장미에서 출발하여 메마른 가시줄기, 해체된 가시, 움직이는 빛 속의 가시, 천에 싸여 꿈틀대는 가시, 천을 뚫고 나온 가시 등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조형언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미완의 면류관'에서 그 표현의 절정을 이루었다.(정수경 미술사학 박사)

'미완의 면류관'은 2002년 능평성당의 제단용으로 제작한 가로, 세로 3미터 크기의 실로 짠 작품이다. 빛나는 가시 면류관. 깊이 드리워진 가시 그림자만큼 가시 줄기와 가시들 표면의 빛은 더욱 빛난다.

'네 자신을 알라'(2007년)는 십자형 가시가 불타는 장면을 담았다. 이번 전시에서마지막에 전시된 이 작품은 의미가 심장하다. '미완의 면류관'은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가시를 끌어안아야만 인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네 자신을 알라'는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 안고 있는 가시들을 불태워 없애야만 개인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다.

송 작가가 가시를 자신의 조형언어로 발전시키는 데는 가족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만일 나의 삶이 순탄했다면 작품의 주제가 가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그는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가난의 고통 그리고 뇌종양으로 어린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이 모든 슬픔과 고통을 예술적, 종교적 차원에서 승화시키고 극복해냈다(정수경)

송 작가의 작품들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다섯가지 다른 색상의 방독면을 쓴 얼굴을 그린 '공습경보'(1974)는 당시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했다. '이라크에서 온 편지'(2006)는 자살폭탄테러의 비극을 다뤘고, '2011.3.11'(2011)은 동일본 대지진을 직접 경험하고서 제작한 것이다. 이들 작품은 전쟁과 재난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조국의 여명' (2016)은 촛불집회를 전후해 그린 작품으로, 산 능선을 뚫고 나온 가시들이 떠오르는 태양에 빛나는 모습은 탄핵 인용을 예고하는 서광처럼 느껴진다.

열쇠를 형상화한 작품이 두 번 등장한다. 1971년 '판토마임'과 2009년 '진홍색'이다. 둘다 열쇠가 마모되는 정도에 따라 세 개를 나란히 배치했다. 1971년 작품은 단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2009년 작품은 홍익대 교수로 있다가 대전시립미술관장으로 발령났을 때를 기념한 것이다. 2009년 작품에는 각기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발령일 2019.5.14을 의미하는 '9M14', 중간에 'BURNS', 마지막에 'MORALE'이 새겨져 있다. 'MORALE'은 객지에서 조심해야 할 경구하고 해서, 'BURNS'는 무슨 뜻이냐고 했다니 본인 이름 번수의 영문 표기라고 했다. 그런데 burn(타오르다)이 연상되는 건 왜 일까?

고통과 분노, 상처의 가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그 가시에서 빛이 나고 싹이 돋을 때까지 껴안고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것- 용기,인내, 희망-이야말로 인류의 구원과 개인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열쇠임을 송 작가의 50년의 무언극은 일깨워준다. 그의 작품 'I LOVE DMZ'(1991)처럼 연인의 열정과 같은 열기가 분단의 가시 철조망을 녹여버리기를 상상해본다.

전시 기간: 3.10 - 6.18
전시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 작품: 판화, 타피스트리(실로 짠 그림), 종이부조, 환경조형물 등 100여 점
도판 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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