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137일, 광화문에 촛불이 모인지 133일, 특검 수사 90일, 탄핵심판 92일이 걸렸다. 가을에서 겨울을 거쳐 봄까지 이어진 방대한 '서사시'를 기억하기 쉽도록, 세종대왕이 남기신 자랑스런 한글 자음으로 정리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고영태였다. 대를 이은 최태민 일가의 '국정농단'을 밝혀낸 최대 공은 고영태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영태가 최순실 태블릿PC 속 '연설문'을 알리고, JTBC가 특종 보도하면서, 40년을 숨어 지내던 '비선실세'가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 'ㄴ' 노무현
박근혜 탄핵심판은 2016년 12월9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부터 3월10일 선고까지 92일이 걸렸다. 변론은 17차례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때는 3월12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부터 5월14일 헌재 선고까지 64일이 걸렸다. 변론은 불과 7차례 뿐이었다. (결과는 기각 5명, 인용 3명, 각하 1명.)
특검 수사기간 90일 동안 박근혜는 결국 대면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검찰 조사는 물론 특검 조사도 받겠다"던 약속을 어김없이 깨뜨렸다. 청와대 압수수색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다르다. '자연인' 박근혜는 검찰이 부르면 무조건 출석해야 한다. 또 버티다간 '구속'이 빨라진다.
◇ 'ㄹ' 라이넥주
박근혜 '비선 진료'로 이름도 생소한 '라이넥주(태반주사)', '푸르설타민주(마늘주사)'는 해외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은 대통령이 맞은 그 주사를 찾았다. 비로소 '창조경제'가 실현됐다. 신문과 방송에는 대통령 얼굴의 피멍과 주사 자국을 비교하는 사진이 실렸다. '주사 아줌마', '기 치료 아줌마', '운동치료 왕십리 원장' 등은 '보안 손님'이라서 특검도 못 들어가는 청와대를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삼성이 최순실 일가를 지원하고, 그 대가로 삼성은 국민연금을 등에 업은 박근혜로부터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 합병을 얻어냈다. 검은 거래의 중심에는 '말'을 매개로 한 돈세탁이 있었다. '삼성 승마단'을 만들어 정유라 훈련용이란 명목으로 한 마리 당 수억원을 호가하는 '블라디미르', '비타나V' 등의 말을 사줬다. 이렇게 총 433억원을 지원했다. 이 말들이 누구 소유의 '자산'이었는지는 보면 안다.
◇ 'ㅂ' 블랙리스트
국정농단 사태의 가장 악질적인 부분이다. 평범한 국민이자 무고한 문화예술인 수천 명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제작 주도자 김기춘과 조윤선은 모두 특검 수사로 구속 기소됐다. 이로써 수년 동안 영문도 모른 채 탄압 받아야 했던 문화예술인들의 서러움은 조금이나마 풀렸을까. 특검은 블랙리스트를 두고 '헌법의 본질적 가치를 위배한 범죄'라고 표현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이 부재했던 7시간은 헌재가 요약한 5가지 탄핵심판 쟁점 중 하나였다. 바로 '생명권보호의무 위반' 부분이다. '비선' 투성이인 박근혜식 국정 운영의 집약이다. 그날 청와대에 들어온 미용사가 머리를 해줬다는 것, "'여성' 대통령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것 외에 대통령은 결국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 'ㅇ' 우병우
'법꾸라지' 우병우를 놓친 게 특검의 거의 유일한 '오점'이다. '국민 현상금'까지 걸렸던 우병우는 증인 채택 후 40여일 만에 국회 청문회에 등장, 모르쇠 태도로 공분을 자아냈다. 특검의 구속영장 청구로 '사이다'를 맛보나 했지만 결과는 '고구마'. 이제 '성역' 우병우를 무너트리는 건 검찰의 몫이다.
법정에 제출된 정호성의 휴대전화 녹음파일 236개로 국정농단은 '의혹'에서 '사실'이 됐다. 박근혜-최순실-정호성의 3자대화는 물론, 각종 보안자료가 넘어간 정황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안종범 역시 대통령 지시사항을 일일이 적어놓은 수첩 56권으로 '사관'이 됐다. 측근들의 '열일'은 탄핵심판의 '빼박' 증거로 작용했다.
◇ 'ㅊ' 촛불
2016년 10월29일부터 19차례의 광화문 촛불 집회가 열렸다. 하루 최대 232만명에 연인원은 1500만명을 돌파했다. 단 한 번의 소요 사태도 없는, 외신들이 '말이 되냐'며 혀를 내두르게 한 촛불 시위는 '시민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태극기'를 들고 나온 탄핵 반대 시위도 있었다. 역사는 이들의 '난동'을 '반동'으로 기록할 것이 틀림없다.
최순실의 지시로 청와대와 삼성이 설계해 전경련을 필두로 대기업에게서 '삥'을 뜯어 만든 '미르·K'재단. 퇴임 뒤 노후 준비엔 역시 재단이 최고였다. 그 아버지에 그 딸 답다. '비선'으로서 나랏돈을 쌈짓돈처럼 쓸 수 있다. 그러려면 돈을 굴릴 차명회사도 필수다. 더블루K, 비덱스포츠, 플레이그라운드, 한국동계영재스포츠센터 등등.
◇ 'ㅌ' 특별검사
2016년 12월1일 박영수 특별검사 임명 이래로 90일간 이재용을 포함해 총 30명을 기소했다. 규모 면에서도, 실적 면에서도 역대 특검 가운데 최고로 평가될 기록을 남겼다. 박근혜에게는 최순실과 공모해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추가했고, 정유라의 이화여대 학사 비리 관련 최경희 총장 이하 학교 관계자들을 줄줄이 재판에 넘기는 성과를 올렸다. 90일 간의 수사 기록은 6만 페이지에 달한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사용한, 그리고 들통난 '차명폰'만 70여대에 달했다. 의상실에서 최순실의 휴대전화를 닦아준 이영선 행정관이 대리점에서 수십 대를 개통해 몇 개월마다 고루고루 나눠줬다. 주로 최순실과 박근혜, '문고리 3인방'이 사용했다. 특히 박근혜는 최순실과 2016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573차례 차명폰으로 통화했다. 독일로 도망간 최순실에게 귀국을 설득할 때도 차명폰을 이용했다.
◇ 'ㅎ' 황교안
박근혜 탄핵 국면에 어부지리로 떴다. '검사장'도 달지 못하고 검찰을 떠났는데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에 오르더니 졸지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됐다. '해고 통보'도 이겨내고 우뚝 선 '황통령'. 이제 대선 날짜를 찍고 나면 (구)새누리당 이름으로 직접 출마할 수도 있다. 과감한 사드 배치 등은 '범보수' 결집을 부추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