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감독'으로 칭송받던 김인식 감독(70)의 '미다스의 손'도 소용이 없었다. 1, 2회 WBC와 프리미어12의 찬란한 성과를 이끈 노장의 마법도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한국 야구 대표팀은 7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7 WBC 서울라운드' A조 네덜란드와 2차전에서 0-5 완패를 안았다. 공교롭게도 4년 전 3회 WBC 1라운드 첫 경기 상대와 스코어가 꼭 같았다.
당시만 해도 복병에 당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한국은 네덜란드의 알려지지 않은 투수 좌완 디에고마 마크웰에 4이닝 무득점에 묶여 0-5로 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 타자들이 상대해봤던 투수 릭 밴헨헐크에 역시 4이닝 무득점에 그쳤다. 알고도 당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실력으로 진 것이다.
6일 이스라엘과 1차전 1-2 연장 10회 패배까지 2연패다. 한국 야구는 이번에도 2라운드 진출이 좌절됐다. 경우의 수가 있다고 하지만 A조 최약체 대만이 네덜란드를 이겨줘야 하는데 가능성이 거의 없다. 대만은 7일 이스라엘에 7-15 대패를 안았다. 또 이스라엘이 네덜란드를 이겨야 하는데 장담하기 어렵다.
김인식 감독도 "강정호, 추신수, 김현수, 박병호 등이 있었다면 이대호(롯데)와 중심 타선을 이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번 대회 3, 4번을 맡은 김태균(한화), 이대호는 2경기에서 16타수 1안타로 2연패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한국 대표팀에서 현역 메이저리거는 오승환(세인트루이스) 1명뿐이었다.
여기에 부상 선수들도 많았다. 좌완 에이스 김광현(SK)과 2009년 2회 WBC '봉열사' 봉중근(LG) 등이 빠졌고, 붙박이 돌격대장 정근우(SK)도 끝내 부상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1차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스라엘 선수들은 대부분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고, 독립리그 출신도 있었다. 한국의 우세가 예상됐지만 승자는 전력상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이스라엘이었다.
6일 한국전 선발은 제이슨 마키는 MLB 통산 124승의 베테랑이지만 지난해 소속팀을 찾지 못해 빅리그 출전이 없었다. 결승타 포함, 멀티히트를 날린 스캇 버챔은 콜로라도 마이너리그 소속이었다. 첫 경기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WBC는 선수들에게 부담스러운 대회가 아닐 수 없다. 시즌을 코앞에 두고 자칫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팀과 자신에게 큰 손실이 된다. 류현진, 추신수, 박병호 등을 비롯해 각 나라의 빅리거들이 WBC에 불참한 이유고, 대회를 주최한 MLB 사무국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렇다 해도 이번 대회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에는 이전 국제대회 때 보여준 간절함이 결여돼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치열한 승부 근성을 보기 어려웠다. 투수들은 KBO 리그보다 한결 넓어진 스트라이크존에도 볼로 도망치기 바빴고, 타자들은 끈질긴 승부로 기회를 잇기보다 무기력하게 끌려다녔다. 실력이나 평가에서 뒤져도 대차게 맞붙으며 헬맷이 부숴져라 뛰었던 예전 태극전사들의 기백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 야구는 2006년 1회 WBC와 2009년 2회 대회, 2008년 베이징올림픽 등에서 야구 종가 미국과 숙적 일본, 아마추어 최강 쿠바 등 야구 강국들을 잇따라 누르고 화려한 업적을 쌓았다. 명성과 실력에서 앞섰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열세라는 평가에 이를 악물고 한 발 더 뛰고 악착같이 살아나 이뤄낸 값진 결실이었다.
2015년 프리미어12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부활하는 야구 금메달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대회에서 한국은 열세를 딛고 우승을 일궈냈다. 개막전에서 일본에 당했지만 준결승에서 거짓말같은 역전승으로 일본을 울렸다.
하지만 이번 대회 대표팀은 19이닝 동안 단 1점에 그친 졸공에 시달렸다. 이스라엘전에서 7안타 6볼넷에도 병살타 2개가 나오며 1점에 머물렀고, 네덜란드에도 6개의 안타와 4개의 볼넷에도 3개의 병살타로 자멸하며 무득점에 머물렀다. 짜임새 있기로 정평이 난 기존의 한국 야구가 아니었다.
2009년 2회 대회는 전력 약화에도 준우승이라는 더 큰 결실을 맺었다. 박찬호(다저스), 이승엽(요미우리)이 빠지는 등 해외파는 추신수(클리블랜드), 임창용(야쿠르트)뿐이었지만 결승까지 진출했다. 2006년 선전에 붙어왔던 병역 혜택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이 있었다는 게 당시 대표팀 관계자의 전언이었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대표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나선다는 것 외에도 선수들에게 현실적인 보상이 따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일본과 4강전에서 승리한 선수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눈물을 쏟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종목은 다르지만 2017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선수들이 "선수 생활을 하는 데 엄청난 부담인 군 문제를 해결해 기쁘다"는 소감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는 한국 야구가 세계 무대에서 선전할 수 있던 엄청난 동기 부여였다. 오죽하면 '군대로이드'라는 표현까지 생겼다.
하지만 2013년 WBC에서는 거짓말처럼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2009년 2회 대회만 해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3회 대회는 이마저도 없었다. 이제 냉정하게 따져 WBC는 혜택보다는 부담이 더 큰 대회였다.
사실 WBC는 앞선 두 번의 대회에서 적잖은 선수들이 후유증이나 부상으로 고전하는 사례가 발생해 선수단 구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2013년 대표팀은 류현진(다저스), 김광현(SK), 봉중근(LG), 김진우(KIA), 홍상삼, 이용찬(이상 두산) 등 다수가 부상으로 교체됐다. 한 지방 구단 감독은 "봉중근은 WBC 대회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면서 "선수들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는 대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KBO 리그 선수들은 FA(자유계약선수) 대박이 잇따라 터지면서 몸값이 폭등했다. 그해 강민호(롯데)가 역대 최고액인 4년 75억 원을 찍었고, 이듬해 최정(SK)이 86억 원, MLB에서 유턴한 윤석민(KIA)이 90억 원으로 최고액을 갈아치웠다.
지난해는 박석민(NC)이 96억 원으로 뛰었고, 올해는 최형우(KIA)가 100억 원 시대를 열었다. 이후 이대호가 150억 원으로 금세 신기록을 경신하며 방점을 찍었다. KBO 리그는 이제 일본이나 MLB에 비해서도 몸값 경쟁에서 뒤지지 않는 리그가 됐다.
KBO 리그는 국제대회에서 소속 선수들의 성적이 어떻든 간에 돈다발을 챙겨주는 리그가 된 것이다. 11시즌 통산 70승에 4점대 평균자책점(ERA)의 차우찬(LG)이 4년 95억 원으로 역대 투수 최고액을 받는 리그다. 더군다나 MLB처럼 부상의 위험이 있다면 소속팀의 요구에 따라 대표팀에서 하차할 수도 있다. 그런 사례가 적지 않았다.
반면 이스라엘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절실함이 있었다. 유대인이라는 뿌리를 찾겠다는 다짐과 함께 소속과 보수 등이 불안정한 현재 상황에서 스카우트들의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지난해 빅리그 8경기 출전에 그친 내야수 아이크 데이비스(뉴욕 양키스)는 7일 기자회견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 이런 큰 무대는 좋은 기회"라면서 "열심히 경기를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많은 선수들이 태극마크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그런 모습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 한국 야구를 이끌어온 이들에게 이번에는 경기 운이 따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누구라서 지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게 두 대회 연속이라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번 WBC 중계 해설을 맡은 원조 코리안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의미있는 발언을 전했다. 네덜란드 내야수들의 수비가 왜 그렇게 좋은가에 대한 해설에서였다. 일단 함께 해설을 맡은 대니얼 김이 "이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퀴라소는 땅이 고르지 않아 불규칙 바운드에 대비해야 해서 수비가 좋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운을 뗐다. 퀴라소는 네덜란드령의 작은 섬으로 대표팀의 70% 이상을 배출했다.
이에 박찬호는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한다"면서 "간절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한국이 네덜란드에 0-3으로 끌려가던 3회 무렵이었다. 시청자들을 위한 해설이었지만 어쩌면 이번 대회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이고 있는 한국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0-5 패배가 확정된 뒤 박찬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너무 한숨이 나오는 경기였고 안타깝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이게 한국 야구의 현실"이라면서 "선수들이 배우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MLB 구단 프런트를 경험한 대니얼 김도 "충격적인 결과"라면서 "800만 관중도 돌파한 KBO 리그 수준이 높아졌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착각이 아니었나 싶다"고도 말했다.
물론 선수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야구 저변을 넓히기보다 단기적인 성과에 눈이 멀어 몸값을 불려온 구단들과 리그 흥행을 위해 기형적인 타고투저를 은연 중에 장려해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린 KBO의 탓이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야구계가 모두 귀담아야 할 부분이 있다. 4년 최대 150억 원에 이르는 KBO 리그 선수들의 몸값은 구단의 모기업이 부담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모그룹은 국민들의 성원 속에 이윤을 얻고 야구단을 운영한다. 선수들의 연봉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자명하다. 누가 그들의 배를 불렸는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곱씹어야 할 대명제다. "국가가 없으면 야구도 없고, 팬이 없으면 선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