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숙적 일본을 꺾은 게 고무적이었습니다. 한국은 지난 24일 일본과 2차전에서 4-1 시원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한국이 일본을 아시안게임에서 꺾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전까지는 8번 싸워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한국은 아시안게임에 앞서 최근 두 차례 일본과 맞대결에서 2연승을 거둔 상승세에 있었습니다.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4년간 이어왔던 무승(1무19패) 행진에 종지부를 찍었고, 지난 11일 경기도 고양에서 열린 유로 아이스하키 챌린지에서도 역시 3-0으로 이기더니 아시안게임에서도 일을 낸 겁니다.
사실 한국 아이스하키는 내년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그동안 전력 보강을 이뤄왔습니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우승에 빛나는 스탠리컵을 두 차례나 받은 백지선 감독(미국명 짐 팩)과 역시 NHL 스타 플레이어 출신인 박용수(미국명 리처드 박) 코치가 부임했고, 골리 맷 달튼(안양 한라)를 비롯해 마이클 스위프트(하이원) 등 귀화 선수들도 가세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본과 경기에서 먼저 활약한 것은 토종 선수들이었습니다. 1피리어드 선제 결승골을 넣은 선수는 막내급인 서영준(22 · 고려대)였습니다. 서영준은 9분33초 상대 골리의 어깨를 넘어가는 슬랩샷으로 기선 제압을 이끌었습니다. 이에 흔들린 일본은 스위프트와 김원중(33), 박우상(32 · 이상 안양 한라)에 연속골을 내주고 무너졌습니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승전보는 비난 고국 팬들만 열광시킨 게 아니었습니다. 같은 아시아권이지만 한국과 양 극단을 중동의 미녀 선수들도 매료시켰습니다. 특히 같은 종목이 아니었음에도 한눈에 반할 만큼 한국 아이스하키의 박력은 대단했습니다.
25일 데이네 뉴 슬라럼 코스에서 대회를 마친 둘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 있던 제게 휴대폰을 주며 기념촬영을 부탁했습니다. 막 남자 회전 금메달을 따낸 정동현(29 · 하이원)의 인터뷰를 끝낸 터였습니다. (다른 메달리스트들처럼 광고판을 배경으로 찍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중동 선수들이라 흥미를 느껴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레바논에도 스키장이 있고 눈도 있다"며 첫 질문에 짐짓 귀엽게 발끈했습니다. 그러더니 성적을 묻자 조금 다소곳하게 결과를 말하더니 "파라야 리조트에서 1년에 눈이 있는 3개월 동안 훈련을 하는데 학교를 다녀야 해서 주말에만 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성적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두 종목 모두 각각 21명 출전 선수 중 17위, 15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표정은 밝았습니다. 둘은 "이번 대회에 와서 정말 기뻤고 좋은 경험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레바논은 태양과 건조한 날씨가 대부분인데 여기는 눈이 정말 많다"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레바논에서 스키는 일반적인 종목이 아니랍니다. 이스칸다르는 "레바논에서는 농구가 가장 인기고 그 다음이 축구"라면서 "스키는 매우 비싼 스포츠"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내가 보기에는 가장 좋은 스포츠 중의 하나인데 인기는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파야드는 "3살 때 스키를 시작해서 6, 7살부터 경기에 출전했다"고 거들었습니다.
"그러면 레바논에서 부자겠다"라는 말에 둘은 깔깔 대며 예의 소녀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이스칸다르는 "부유하진 않지만 스키를 탈 정도는 된다"고 귀띔했습니다. 이어 "스키 선수 중에는 노르웨이의 헨릭 크리스토퍼슨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둘은 살짝 당황하면서 "물론 한국 선수들은 훌륭하다"고 둘러대는(?) 듯하더니 대뜸 "우리는 어제 한국의 아이스하키 경기를 봤다"고 말을 돌렸습니다. 24일 열린 한국-일본의 경기를 관전했다는 겁니다. "한국이 4-1로 이겼는데 일본에 처음 이긴 게 아니냐"면서 "정말 잘 하더라"는 나름의 관전평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둘이 아이스하키 경기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랍니다. 파야드는 "레바논에는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스노보드 선수뿐"이라면서 "아이스하키 자체가 없어서 그 전에는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스칸다르는 "어제 티켓을 사서 경기를 봤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마침 그 경기가 최고의 흥행 카드인 한일전이었고, 둘은 첫 관전에서 승리를 거둔 한국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듯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아이스하키를 해보라"는 농담에 둘은 천진하게 웃으면서 "언젠가 한국으로 가서 시도해보겠다"고 받아쳤습니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도 아시안게임 사상 첫 승과 중국전 첫 승 등 괄목할 만한 기량으로 3승(2패)을 거뒀고, 중국전 연장승으로 아쉽게 승점 차에서 뒤져 4위로 마무리했습니다. (파야드와 이스칸다르는 "내년 평창올림픽 스키에 출전할 것이냐"는 말에 "가고는 싶다"는 했습니다. 그러나 출전 자격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한국 아이스하키가 아시안게임을 강타한 겁니다. 당초 일본은 이번 대회 아시아 정상급 스나이퍼 구지 슈헤이를 비롯해 다나카 고, 우에노 히로키 등을 모아 안방에서 금메달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된 한국에 힘 한번 제대로 은메달마저 내줘야 했습니다. 홋카이도 지역지 도신스포츠의 아이스하키 담당 하토리 게이타 기자는 "일본이 이길 수 없는 경기였다"면서 "한국이 그만큼 경기를 지배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렿다고 해도 탈튼, 스위프트, 마이크 테스트위드 등은 이미 한국인입니다. 푸른 눈을 가졌지만 태극기와 애국가에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백지선 감독도 지난 26일 중국을 꺾은 뒤 '귀화 선수들이 많다'는 취재진의 말에 "내 눈에는 그들 모두 한국인"이라면서 "피부와 눈 색깔이 다를지 몰라도 한국에서 6~7년을 뛰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로 대화하고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휘갑을 쳤습니다.
귀화 선수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백 감독은 "국내 선수들도 귀화 선수들의 기량과 경험을 배워 성장해왔다"면서 "지금은 국내 선수의 비중이 더 크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대표팀은 선도해온 귀화 선수들을 토종 선수들이 바짝 쫓아왔을 만큼 발전해왔고, 또 이들이 내년 평창올림픽을 위해 다른 색의 피부와 눈이지만 하나로 똘똘 뭉친 '아이스하키 팀 코리아'입니다.
한국 아이스하키는 이번 대회 남녀 모두 의미있는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백 감독과 여자 대표팀 새러 머레이 감독의 말대로 한국 아이스하키는 발전해 나가야 할 부분이 더 많은 팀입니다. 이역만리 레바논, 또 문외한인 선수들까지 반하게 할 만큼 한국 아이스하키는 충분한 저력이 있습니다. 내년 평창에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할 '팀 코리아'의 행진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당시에도 한라에는 외국 선수가 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한라에는 2005-2006시즌 아시아리그 득점왕 송동환 등 국내 스타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송동환은 최강 일본 출신 선수들과 유럽리그 출신 외인들을 제치고 최고 공격수로 우뚝 섰고, 일본 외 선수로 첫 공격 포인트 100개 고지도 밟으면서 일본 팬들을 몰고 다녔습니다.
그 바통을 현재는 꽃미남 스타 김원중 등이 잇고 있습니다. (김원중은 누군가의 연인으로도 알려져 큰 유명세를 타기도 했죠.) 그만큼 한국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팬들을 사로잡습니다. 이미 매력 발산은 충분히 한 만큼 이제는 실력을 내년 평창에서 입증할 한국 아이스하키의 미래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