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삿포로 레터]'연아 키즈'가 따낸 金메달은 1개 더 있습니다

'친구야, 고맙다' 최다빈(왼쪽)과 김나현이 25일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경기 뒤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대회를 마무리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삿포로=노컷뉴스)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경사스러운 날이었습니다. '피겨 여왕' 김연아(27)가 은퇴한 이후 비로소 오랜만에 들려온 국제대회 우승 소식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른바 '연아 키즈'로 불리는 기대주들이 쑥쑥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 흐뭇한 경기였습니다. 기량뿐 아니라 마음도 큰 선수로 자라나고 있어 더 뿌듯했습니다.

'2017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피겨 경기가 열린 25일 일본 홋카이도현 삿포로의 마코마나이 실내링크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선수는 최다빈(17 · 수리고).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와 가장 우아한 연기로 빙판을 수놓았습니다. 그래서 경기장을 메운 관중과 취재진은 4시간 가까운 경기를 기다렸나 봅니다.

한국 피겨 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입니다. 최다빈은 기술점수(TES) 68.40점과 예술점수(PCS) 57.84점을 더해 126.24점을 받아 1위에 올랐습니다. 지난 23일 역시 1위에 올랐던 쇼트프로그램(61.30점)까지 187.54점으로 우승을 확정지었습니다. 2위인 리지준(중국)은 175.60점으로 최다빈과 10점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당초 이날 경기는 쇼트에서 최다빈에 0.32점차 2위였던 홍고 리카의 역전 우승이 예상됐습니다. 개최국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인 데다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최다빈보다 나은 성적을 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고는 우승에 대해 부담을 느낀 듯 잇딴 점프 실수로 161.37점으로 4위에 그쳤습니다. 피겨 강국 일본이 아시안게임 여자 싱글에서 '노 메달'에 머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홍고에 이어 마지막으로 나선 최다빈의 연기는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영화 닥터지바고의 배경음악에 맞춰 최다빈이 첫 점프 과제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완벽하게 소화할 때부터 느낌이 좋았습니다. 이후 트리플 플립과 더블 악셀-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가산점 행진을 달리면서 우승을 예감했습니다. 트리플 살코에서 받은 회전수 부족 판정이 옥에 티였지만 금메달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최다빈(가운데)이 25일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피겨 여자 싱글 우승을 차지한 뒤 기자회견에서 2위 리지준(왼쪽), 3위 엘리자벳 투르신바에바 등 메달리스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삿포로=노컷뉴스)
최다빈의 금빛 연기를 누구보다 기쁘게 바라본 선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동갑내기 대표팀 동료이자 친구, 라이벌이기도 한 김나현(과천고)이었습니다. 친구의 우승에 김나현은 "잘 했어, 축하해"라고 격려했고, 최다빈도 "고맙다"고 화답했습니다. 최다빈은 이후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자랑스럽게 들었습니다.

사실 둘의 첫 아시안게임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최다빈은 우여곡절 끝에 출전했지만 화려하게 '삿포로의 여왕'으로 등극하며 인생 최고의 장면을 만든 반면 김나현은 부상으로 그동안 준비해왔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발목 부상에 허벅지 통증까지 겹친 김나현은 점프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13위(108.77점)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김나현의 아시안게임은 아픔만 남은 건 아닙니다. 선수로서 한 단계 더 클 수 있는 충분한 계기가 될 겁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만큼 성숙해질 김나현입니다.

김나현은 경기 후 "점프를 뛰면서도 아파서 겁 먹고 뛸 때 다른 친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펑펑 뛰는 게 너무 부러웠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동안 부상이 없었던 김나현으로서는 처음 겪는 감정이었을 겁니다. 그런 만큼 건강한 몸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겁니다.

향후 철저한 자기 관리의 바탕이 될 겁니다. 김나현은 " 아프지 않은 느낌을 찾아서 부족한 점프나 원래 뛰던 점프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다"고 다짐했습니다.

김나현은 지난 16일 강릉 ISU 4대륙 선수권대회 때 쇼트프로그램을 마친 뒤 부상으로 프리스케이팅을 포기했다. 평소 표정 연기가 일품인 김나현이었지만 경기 중 통증이 읽히는 표정을 어쩔 수 없었다.(사진=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
이번 대회 기간의 소득은 또 있습니다. 김나현은 아시안게임을 치르면서 아름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오는 3월말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친구 최다빈에게 양보하기로 한 겁니다. 대승적인 판단을 내린 것은 선수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큰 성장이었습니다.

세계선수권은 그야말로 정상급 기량의 선수들과 한판대결을 벌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김나현의 생애 첫 출전이기도 합니다. 지난 1월 세계선수권 대표 선발전을 겸해 열린 전국남녀 종합선수권대회에서 김나현이 부상을 이기고 출전 자격을 얻어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시 김나현은 세계선수권 출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김나현은 더 크게 생각했습니다. 세계선수권은 내년 평창올림픽 출전 티켓이 걸린 중요한 대회인 까닭입니다. 세계선수권은 2위 이상 선수의 국가에 올림픽 출전권 3장, 3~10위 선수에게는 2장을 줍니다. 2014 소치올림픽에서도 김연아가 2013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면서 3장을 가져와 박소연(20 · 단국대), 김해진(20 · 이화여대)까지 출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때문에 김나현은 부상으로 온전한 컨디션이 아닌 자신보다는 최다빈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겁니다. 최다빈은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14위에 올랐지만 올해는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해 경험이 쌓인 데다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다빈은 지난 18일 끝난 ISU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 쇼트프로그램(61.62점), 프리스케이팅(120.79점)에 총점(182.41점)까지 모두 ISU 공인 개인 최고점을 찍었고,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이를 또 넘어섰습니다.

아시안게임을 마친 뒤 김나현은 "세계선수권은 정말 큰 대회여서 포기하기 어려웠지만 올림픽이 걸려 있어서 다빈이가 나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기권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지금은 후회는 안 한다"고 담담하게 웃었지만 결심하기까지 고민의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김나현이 25일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피겨 여자 싱글 경기를 마친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다 감정이 북받친 듯 상념에 잠겨 있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삿포로=노컷뉴스)
최다빈에 대한 격려와 조언도 잊지 않았습니다. 김나현은 "양보한다는 말에 다빈이가 부담이 정말 많이 된다고 하더라"면서 "올림픽이 걸린 대회지만 부담 갖지 말고 라이벌 아닌 친구로서 응원하고 있겠다"고 진심을 전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전해들은 최다빈도 뜨겁게 화답했습니다. 최다빈은 일단 "나현이가 발목 통증 때문에 힘들어 했는데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다"며 친구의 부상 투혼에 깊이 감화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이어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세계선수권에서 2장의 올림픽 티켓을 받아와 같이 나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평창올림픽에서는 (김나현과 함께) 함께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힘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번 아시안게임 피겨 여자 싱글의 우승자는 최다빈입니다. 개최국 일본을 넘어 '삿포로의 여왕'으로 우뚝 섰습니다. 하지만 기량을 떠나 이번 대회 선수들의 마음씨를 겨루는 번외 종목이 있다면 김나현이 단연 금메달일 겁니다.

김연아에 이어 한국 피겨를 이끌어갈 쌍두마차로 나설 두 친구의 우정과 선의의 경쟁이 눈보라,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왕국 삿포로를 훈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친구야, 올림픽에 함께 가자!" 둘의 '삿포로 결의'가 내년 평창에서 이뤄질지 기대가 됩니다.

'친구야, 이 손 잡고 함께 가자' 최다빈은 지난 18일 ISU 4대륙 선수권대회에 이어 일주일 만에 맞은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에서 잇따라 개인 최고점을 써내며 평창올림픽 출전 티켓이 걸린 오는 3월 말 ISU 세계선수권대회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사진=평창 조직위)
p.s-김나현은 프리스케이팅 경기를 먼저 끝내 마지막 순서였던 최다빈의 경기에 앞서 취재진과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시즌을 마무리한 후련함에 김나현은 인터뷰 내내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큰 결심으로 출전권을 양보한 뒤 둘이 나눈 재미있는 대화 내용도 들려줬습니다. 김나현은 "세계선수권에 대신 나가라는 말에 다빈이가 '나 부담스러운데 왜 네가 그냥 나가지 그러냐'고 하더라"면서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짐짓 친구를 원망하는 귀여운 투정이었겠죠.

그러면서도 김나현은 친구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취재진이 "최다빈이 세계선수권에서 김나현 몫까지 올림픽 티켓 2장을 따와야겠네"라고 말하자 김나현은 "그렇게 말하면 다빈이가 더 부담스러워 한다"면서 취재진에게 당부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을 대신해서 나설 최다빈이 무거운 짐을 느낄까 봐서였습니다.

그런데 최다빈에게 김나현이 말리던 그 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기자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함께 평창올림픽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도록 힘을 내겠다"는 최다빈의 결의에 찬 답을 들으며 둘의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부담을 이기게 해줄 겁니다. 마음이 합니다.(김나현 선수, 양해 바라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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