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실화 영화는 많다. 그러나 사건이 '현재 진행형'인 실화 영화는 많지 않다.
실화에 얽힌 이들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만큼, 메가폰을 잡은 감독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 '재심'의 김태윤 감독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이 이야기를 만났을 때가 '또 하나의 약속' 개봉 전이었어요. 실화 영화는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시나리오 쓰기도 힘들고, 생각해야 될 게 너무 많고, 사실 지금 같은 사회나 환경에서 투자도 너무 힘들고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자가 취재한 노트를 봤는데 도저히 영화로 만들지 않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심'의 이야기는 영화 이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2000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발생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이 사건으로 한 소년은 살인범으로 몰려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하다 청년이 됐다. 그 중심에는 경찰의 강압 수사가 있었고, 누명을 쓴 최모 씨는 지난해 말에야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고 싶다'가 중간에 방송된 거예요. 사건을 수면 위로 올린 기자에게 이 사건이 너무 알려지지 않고 힘드니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받았었고요. 그 이후에 박준영 변호사를 만났죠."
김 감독은 박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렸다. 박 변호사는 첫 만남부터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고. 영화로 인해 인연을 맺어 이제 두 사람은 절친한 '형동생' 사이가 됐단다.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남의 불행을 이용해 명성을 얻으려던 변호사에 불과했다. 원래는 대기업이나 대형 로펌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재심 전문 변호사가 되어있더라. 그게 영화를 만드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됐어요. 캐릭터 출발이 거기에서부터 시작됐거든요."
박 변호사에게 영감을 얻은 대사도 있다. 영화 속 준영이 재심을 시작하기 직전 내뱉는 한 마디가 대표적이다. "제가 본 법정에 선 이유는 검찰과 경찰, 법조인에게 사과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재심 최종 선고일에 갔더니 박 변호사가 사과하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유감 표명으로는 안되니까 사과하라는 입장이었어요. 사실 박 변호사나 피해자 최모 씨에게서 딱히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은 없었습니다. 그냥 저는 그 친구 마음 속 응어리가 좀 풀리는 영화가 됐으면 해요."
"사실 이 소재를 선택한 순간부터 사법부를 비롯한 공권력에 비판적인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방점을 어디에다 두느냐가 중요한 거죠. 공권력을 악마적으로 묘사할 것이냐, 아니면 극복하려고 노력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냐. 저는 후자를 택했어요. 절대악을 만들어서 그것과 싸우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경찰에서는 꺼리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말하니 그는 오히려 경찰 내부에서 다시는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권장해야 되는 영화가 아니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우문현답'이었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는 박 변호사를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고 했다. 사회적 약자들이 고객인 박 변호사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고픈 마음을 내비쳤다.
"박 변호사를 보고 있으면 대단해요. 재심해달라고 찾아온 분들을 모시고 다니거든요. 저번 시사회에도 모시고 와서 계속 이야기를 듣더라고요. 저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은데 말이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래요. 더 유명해져야 한다고. 그래야 재심 사건들도 힘을 가질 수 있고, 그 힘으로 사건을 돌파하고 싶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도움이 됐으면 하죠."
'재심'은 개봉 이전부터 줄곧 '변호인'에 비교돼왔다. 어려움에 처한 사회적 약자를 구하고, 그 과정 속에서 '속물 변호사'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참 비슷한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변호인' 같은 멋진 법정 영화를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아마 부족한 결말일 수 있어요. '변호인'에서 주연을 맡았던 송강호 선배가 '재심'을 보시고 나서 마지막에 그렇게 영화를 끝내는 게 쉽지 않은데 잘했다고, 의미 있고 용기 있는 영화라고 말씀해주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또 다른 실화 영화가 있다. 바로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그려낸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다. 일부러 사회 비판적인 소재를 다루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이 움직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실화 영화에 끌린 게 됐네요. 어찌됐든 그런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쓰고 싶고, 관객과 만나고 싶은 그런 영화를 하게 되는 거죠. '또 하나의 약속'은 규모에 비해 예산이 너무 적어서 제약이 많았어요. 그래서 연출자로서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문제적 영화라고 하는데 오히려 이런 영화들을 정부에서 권장하고 선전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드네요."
마지막으로 그는 '재심'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요즘 영화 감독들이 무엇과 싸우는지 아세요? 휴대폰이에요.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이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아요. 한 시간 정도만 지나면 휴대폰을 꺼내기 시작하는데 '재심'에서는 많이 안 꺼내더라고요. 실화 영화라고 해서 결코 무거운 영화는 아니에요. 이 영화가 끝나고 약촌오거리 사건을 검색해 본다면, 그래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를 생각해 본다면 되게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