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미술관에 가다: 그림으로 본 패션 아이콘

<샤넬, 미술관에 가다: 그림으로 본 패션 아이콘>는 2008년 출간된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스카프, 니트, 숄, 안경 등 다양한 패션 아이템의 역사에 대한 글이 추가되었고, 몇몇 글은 내용과 도판을 보강했다.

1장 ‘나를 완성한 패션’에서는 코코 샤넬, 마거릿 대처, 버지니아 울프 같은 유명인의 초상화를 통해 패션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짐작하게 해주는 입구가 될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소장된 마거릿 대처의 초상화는 로드리고 모이니핸의 작품이다. 17세기 초상화의 거장 앤서니 반다이크의 초상화 형식을 참조해서 그려졌다는 마거릿 대처의 초상화는 위압적이지 않지만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다. 회색 실크 블라우스와 진주 귀고리와 진주목걸이의 매치가 우아하면서도 영국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여걸의 카리스마를 은은히 드러낸다.

18세기 초에 그려진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초상은 패션이 통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왕이 63세 때 그려진 이 초상화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매끈한 각선미를 뽐내는 왕이 그려져 있다. 차림새는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흰 담비 털로 안감을 댄 푸른색 로브, 다리를 꼭 맞게 감싸는 흰색 타이츠, 한껏 부풀려 올린 헤어스타일, 손에 든 황금 홀 그리고 빨간색 굽이 돋보이는 하이힐까지, 화려하기 그지없다. 루이 14세는 약 300점의 초상화를 남겼다고 한다. 초상화마다 화려한 패션을 뽐내었음은 물론이다. 그가 사치스럽고 자기도취가 강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루이 14세는 초상화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특산품’, 즉 사치재를 홍보하는 홍보 모델을 자처했던 것이다. 이런 초상화들을 통해 루이 카토르즈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 루이 14세 시대의 양식은 온 유럽의 미적 표준이 되었다.


2장 ‘시대를 움직인 패션’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 패션을 통해 패션의 변천은 물론 시대정신을 읽는다. 17세기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터키풍은 역설적이게도 복식 개혁 운동과 맞물리면서 대안 패션으로 부상했다. 터키풍 바지를 변형한 여성용 판탈롱 블루머가 스포츠 패션으로 각광받으며 서양 여성들이 처음으로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서양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중국과 일본 문물도 서양 패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각각 시누아즈리, 자포니슴이라고 불린 흐름이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그리스 로마 시대를 본받아야 할 시대로 설정하면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의복 키톤을 재해석한 슈미즈풍 옷이 유행한 것도 흥미롭다. 애초에 순수하고 명쾌한 혁명정신을 표상하는 기호로서 등장한 이 유행은 이후 단순화에 대한 요구가 과해지면서 ‘누가 가장 최소한으로 입을 수 있는가’를 경쟁하는 듯한 모양새를 낳기도 했다고 한다.

상복을 입은 미망인을 그린 티소의 그림을 통해서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상례가 아주 엄격했던 이 시대에 특히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상복을 입고 지내야 하는 의무 기간이 배로 길었고 상복을 제대로 입지 않았을 경우에 가해지는 사회적 처벌도 훨씬 가혹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같은 화가가 그린 「홀아비」 속 아이를 안은 남자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복식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그저 ‘작은 사람’이라고만 파악하다가 ‘아동’의 개념이 확립되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 ‘아동복’의 변천을 살펴보는 글도 흥미롭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션 요소들이 현재에도 변주되어 나타난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

3장 ‘유혹하는 패션’은 패션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라 할 ‘유혹’에 관해 다룬다. 부채, 마스크, 장갑, 안경, 가터벨트 등 유혹의 의미를 함축한 패션 아이템들을 중심으로 ‘작업’을 위해서 반드시 배워야 했던 부채 언어, 무도회의 필수품 가면과 애교점, 로코코 시대 여인들의 꽃단장 기술 등 그림 속에 나타난 유혹의 진수를 보여준다.

4장 ‘아이템으로 보는 패션’에서는 모자, 스카프, 숄, 클러치 등 패션 아이템들이 그려진 그림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일례로 ‘모자’ 하나만 가지고도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자는 쿠르베의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에서는 예술가의 드높은 자부심을 상징하는 소품이었고 마네의 「뱃놀이」에서는 19세기 산업혁명의 수혜자인 유한계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 밀짚모자인 ‘보터’는 마네뿐 아니라 많은 인상주의 작가들이 행복한 삶의 상징, 특권으로서 레저의 등장을 표현하는 오브제로 썼다. 그런가 하면 모자는 계급성을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했다. 사전트의 「리블스데일 경의 초상」에서 리블스데일 경이 쓰고 있는 톱해트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체스터필드 오버코트, 승마용 바지와 부츠 등 다른 의상들과 합쳐져 귀족 계층의 드높은 자존심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로트레크의 「라미 카페에서」의 불콰하게 취한 남성이 쓴 보울러 해트는 중산층으로 계층 이동의 욕구를 지녔던 노동자 계급을 상징한다.

이 책은 화려한 도판들이 눈을 즐겁게 하는 한편으로, 패션과 미술에 관한 지식을 쏙쏙 전달해준다. 미술관에서 패션을 배웠다는 지은이 자신의 경험이 책 속에 녹아 있는 덕분이다. 그림이 그려진 시대와 화가, 그리고 모델과 그/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패션이 결국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 속으로

퐁파두르 부인이 입고 있는 실크 드레스의 패턴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중국풍 패션이 인기를 끌면서 유럽에서 자체 생산하게 된다. 무늬가 새겨진 실크는 중국풍 디자인을 서구에 소개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고급 리넨에 수놓은 용과 개, 사자, 불사조 문양들은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동양풍 텍스타일은 세기를 더해가면서 더욱 심미적 경향을 띠게 된다. 나아가 서양 복식이 동양풍 패턴과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서양 전통 패션에 중국풍이 자연스레 녹아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상 로코코 시대의 섬세하고 환상적인 여성미의 바탕에는 ‘동양’이라는 타자에 반응하는 서양의 방식이 숨어 있다. _「태평양을 건너간 중국의 매력」에서(p.58)

18세기 초 폼페이 발굴은 서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폼페이의 회화, 조각, 공예품이 당시 미술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의상, 가구, 공예, 실내디자인, 심지어 여인의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혁명과 폼페이 발굴은 서로 맞물리며 혁명 세력을 위한 복식을 낳는다. 바로 엠파이어 스타일(empire style)이라 불리는 모슬린 드레스다. 이 옷은 살이 다 비치는 소재로 만들어졌고, 여성의 몸 선을 자유롭게 드러내며 행동의 편의성까지 제공했다. 이것은 순수하고 명쾌한 혁명정신을 표상하는 일종의 기호로서 등장했다. 당시 여성들은 ‘누가 가장 최소한으로 입을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까지 벌였다고 한다. 잘 차려입는 것보다 ‘잘 벗은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셈이다. 사교모임에서는 여자들의 옷 무게를 재는 게임도 생겨났다. _「영원한 순수」에서(p.78)

김홍기 지음 | 아트북스 | 304쪽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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