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단체장과 관련된 비리는 근절되지 않은 한국 스포츠의 골칫거리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 최순실의 측근인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서슬푸른 칼날을 휘두를 수 있던 것도 비리가 끊이지 않는 체육계가 빌미를 제공한 탓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단체장과 관련해 이권을 놓고 벌어지는 파벌, 계파 싸움으로 진흙탕이 된 종목도 한둘이 아니다.
볼링 역시 협회장 비리와 무관하지 않은 종목이었다. 전임 지중섭 회장은 1996년 이후 무려 17년 동안 협회 수장을 맡아오다 2012년말 대한체육회 감사에 적발돼 사임했다. 당시 지 회장은 선수의 국제대회 상금에서 떼낸 1억4000만여 원 중 약 3500만 원을 증빙서류 없이 사용한 게 드러났다.
지 회장의 뒤를 이은 사람이 현 김길두 회장이다. 2013년 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김 회장은 전임 회장 시절 감사였다. 그러나 체육회 감사에서 김 회장은 당시 대의원이 아님에도 감사로 활동한 점이 지적됐다. 자격 논란을 빚은 전임 감사를 후임 회장으로 뽑아준 협회였다.
문제는 대를 이었다. 이번에도 선수 상금을 유용했다는 혐의가 불거졌다. 이 전 감독은 "김 회장이 선수의 상금 중 70%를 떼낸 가운데 각종 오픈대회 참관 개인 경비로 사용하고 선물 구입, 가족 식대 등으로 경비를 불법 전횡했다"고 폭로했다. 또 협회는 전임 집행부에서 인계받은 상금 1억2100만 원 중 9500만 원 이상의 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의혹도 받는다.
이번 김 회장의 비리 논란은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순실 사태'와 흡사한 부분이 적잖다. 비리 의혹이 터진 계기가 이른바 '동업자'의 폭로라는 점이 비슷한 데다 윗선에서 봐주기를 했다는 점도 최순실 파문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가 가장 문제라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동업자 폭로-윗선 봐주기 '최순실 사태'와 흡사
일단 김 회장은 이날 총회 모두 발언에서 이런 혐의들을 전면 부인했다. 김 회장은 "근거도 없는 음모, 꾸며낸 모함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현재 엄연한 피의자다. 지난해 8월 제 20대 회장 선거 당시 김 회장은 국가대표 감독 출신 A 씨에게 총 1350만 원을 주고 선거운동을 부탁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A 씨는 이런 내용의 고발장을 지난해 9월 송파경찰서에 제출했고, 현재 기소 의견으로 서울동부지검에 송치된 상황이다.
볼링계에서는 김 회장과 한 배를 탔던 A 씨가 서로 관계가 틀어져 불법선거에 대한 폭로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볼링계 인사는 "선거 전 도움을 부탁했던 김 회장이 당선 뒤 약속을 뒤집으려고 하자 A 씨가 불만을 품고 터뜨린 것"이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훈장까지 받았던 A 씨가 왜 저렇게 나섰겠는가"라고 귀띔했다. 최순실의 측근이던 고영태 씨의 폭로로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가 밝혀진 대한민국의 상황과 흡사하다.
이는 조영호 전 체육회 사무총장의 결재로 이뤄졌다. 볼링인들은 "조 전 총장이 김 회장과 동향(전남 벌교)"이라면서 봐주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총회에서 김 회장은 조 전 총장과 친분에 대해 "아는 분"이라면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다"고 밝혔다. 최순실과 관련된 비리를 눈감아준 혐의를 받고 있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조 전 총장은 지난해 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실권을 잡은 생활체육 쪽 인사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부르짖은 정부 쪽 인사였다. 이런 조 총장이 불법선거 피의자인 김 회장의 직무정지를 풀어준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 회장은 "협회 직원들이 연말 결산과 신년 예산 등을 위해 회장의 직무 복귀에 대한 공문을 체육회에 제출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팽팽한 주장-진실 공방' 최순실-고영태 보는 듯
일단 다수의 볼링인들은 김 회장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전·현직 협회 임원과 감독 등 1607명의 서명을 받아 김 회장의 비리 의혹을 담은 진정서를 검찰과 문체부, 체육회 등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진 상황 자체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볼링인들도 적잖다. 한 볼링계 인사는 "솔직히 세계 정상급 기량을 갖춘 한국 볼링이 협회의 문제로 논란이 된 게 창피하다"고 개탄했다. 한 마디로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이다.
김 회장의 불법선거 혐의를 고발한 A 씨 역시 비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A 씨는 전임 지 회장 시절 협회 부회장을 맡은 측근이었다. 국가대표 총감독으로도 나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당시 선수들에게 폭력을 행사에 국제적인 망신을 샀던 인물이다.
이날 총회에서 김 회장은 A 씨에게 1350만 원을 빌려준 데 대한 이유를 밝혔다. 김 회장은 "A 씨가 현 국가대표 감독에게 '월세가 없어 쫓겨나야 하는 신세니 1000만 원을 빌려달라. 그러지 않으면 감독을 내가 하겠다'고 협박했다더라"고 말했다. 이어 "이후에도 A 씨에게 협박을 당한 볼링인이 호소해와 350만 원을 더 빌려줬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이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A 씨가 보내준 계좌로 직접 송금한 점을 감안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김 회장의 해명과 A 씨의 고발, 어느 쪽이 사실이든 볼링협회의 치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둘의 말이 극명하게 대치돼 진실 공방으로 흐르는 점도 최순실을 둘러싼 인물들의 행태와 비슷하다.
총회 뒤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검찰 조사 결과를 기다려보고 좋은 결과(무혐의 등)가 나오면 (반대파들을) 전부 안고 좋은 쪽으로 이끌어나가겠다"고 밝혔다. 나쁜 결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정통한 한 인사는 "아마도 벌금형이든 집행유예든 회장 자격에 영향을 줄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시안게임 효자 종목인 볼링은 최근 유명인들의 프로 도전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원조 리듬체조 요정 신수지가 프로로 데뷔한 데다 톱스타 김수현과 인기 그룹 FT 아일랜드의 보컬 이홍기, 가수 채연 등도 문을 두드리고 있다. 볼링협회가 '복마전' 꼬리표를 떼고 이런 인기에 걸맞는 행정을 펼칠 계기가 마련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