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 루슬란 카라에프, 그가 진정 아름다운 이유

[격투칼럼] 루슬란 카라에프의 부활을 반기며

K-1 경기에 등장할 때마다 리듬에 온몸을 맞긴 채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미소짓는 명랑청년, 글라우베 페이토자전에서 KO패를 당한 후 아쉬운 나머지 차가운 체육관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한참동안 패배의 아픔을 곱씹던 투지 넘치는 청년, ''포연과 총성의 땅'' 고향 북오세티아 아이들에게 K-1 기술을 가르쳐주며 ''파이터''의 꿈을 심어주는 순수청년, 바다 하리와의 2차전에서 K-1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빚어낸 젊은 파이터….

뭇 여성을 설레게 하는 훈훈한 외모는 그저 덤일 뿐이다. 25살의 파이터 루슬란 카라에프(러시아), 그는 침체된 K-1의 ''희망''이자 ''미래''다.

"당신은 아주 멋지고, 파워풀하고, 아름다운 시합을 한다." (대만)
"암투병 중인 당신의 어머니도 무척 행복했을 거에요." (한국)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와줘 기쁘다. 다음엔 바다 하리가 두른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갖고 올 차례다." (미국)

경기가 끝나자 그의 공식홈피엔 전 세계 격투기팬들로부터 축하 메시지가 쇄도했다. 1년 만에 복귀한 K-1 링을 자신의 독무대로 만든 루슬란 카라에프. 번개같은 전진스텝, 폭발적인 러쉬, 돌려차기·백스핀 블로우 같은 화려한 기술은 여전했다. 몸은 더욱 탄탄해졌고, 펀치는 훨씬 묵직해졌다. 레프트훅을 날릴 때 스윙궤적이 커서 순간적으로 안면이 노출되는 단점은 그대로였지만 ''파이터'' 카라에프는 1년 간의 공백이 무색하리만큼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 됐다.


그는 빛 속에 있었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났다.

2008월 7월 13일 K-1 월드그랑프리 타이완 대회가 열린 대만 타이페이 TWTC 난강홀. 8강 토너먼트에 출전한 카라에프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토미히라 타츠후미(일본), 김영현(한국), 알렉산더 피츠쿠노프(러시아)를 잇달아 KO로 침몰시켰다. 3경기를 모두 치르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05년 월드그랑프리 라스베가스대회 이후 두 번째 WGP 타이틀 획득. 올해 9월 서울에서 열릴 K-1 WGP 개막전 티켓도 거머쥐었다.

조각같은 몸매, 영화배우 톰 크루즈를 닮은 수려한 외모, 저돌적인 인파이팅, 특유의 장난끼 어린 미소까지…. K-1 대회가 처음 열린 대만 팬들도 카라에프에 매료됐다. 그의 시합 차례가 되면 환호성이 커지고, 박수소리는 거셌다. 하지만 그가 진정 대단한 이유는 시련을 극복하고 더욱 강해졌다는 데 있다.

지난 1년간 카라에프에겐 유난히 많은 고난이 닥쳤다. K-1 무대에선 3연속 실신 KO패를 당했다. ''실신 아티스트'', ''잠자는 링 위의 왕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팬들은 그가 무너질 때마다 ''깨어나라! 카라에프''라는 구호를 외쳤다. 2005년 WGP 라스베가스대회에서 우승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카라에프지만, 전문가들은 ''K-1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라는 평가에 의문부호를 달기 시작했다.

글라우베 페이토자에겐 브라질리언킥을 맞은 후 그로기 상태에서 수많은 펀치를 허용해 1라운드 실신 KO패(2006년 12월 2일 WGP 8강전). 바다 하리에겐 먼저 다운을 빼앗고도 곧바로 턱에 오른쪽 카운터 펀치를 맞고 넉아웃(2007년 3월 4일 WGP 요코하마 대회). 종합격투가 멜빈 마누프에겐 1라운드 31초 만에 레프트훅을 얻어맞고 충격의 실신 KO패(2007년 6월 23일 WGP 암스테르담 대회). 2007년 9월 서울 개막전에선 제롬 르 밴너와 맞붙을 예정이었지만 경기 이틀 전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출전이 불발되기도 했다.

경기 외적으로도 어머니가 암투병 중이라서 정신적인 고통이 심했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상에서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지난 13일 월드그랑프리 타이완 대회 전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우겠다"고 했던 카라에프는 뜻대로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그러곤 "어머니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친다"고 우승소감을 밝혔다. 경기 내내 슬픔이 서려있던 그의 깊은 눈매에도 마침내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의 경기는 승패에 관계없이 화끈하고 재밌다. 뒤지고 있어도 클린치가 거의 없고, 상대가 누구라도 물러섬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너무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탓에 상대에게 파고들다가 카운터펀치에 당할 적이 많다. 그래서 ''유리턱''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하고, 팬들도 ''조금만 가드에 신경써달라''며 안타까운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카라에프의 공격본능은 타고난 듯 보인다. 링 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그의 생존본능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다.

러시아 국적을 사용하지만 그의 고향은 러시아연방 북오세티아 자치공화국. 북쪽으론 체첸, 남쪽으론 그루지아 공화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대표적인 분쟁지역이다. 북오세티아는 한낮에도 폭탄테러가 발생하고, 아이들을 볼모로 한 유혈 인질극이 벌어지는 곳.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기독교 국가라서 이슬람 원리주의자 ''와하비트''의 주요 공격대상이다.
그는 "인생 자체가 전쟁이라"고 말한다. 나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곳에서 태어난 그에게, 무시로 울리는 총성에 매일밤 ''죽느냐, 사느냐''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내전지역에서 자란 그에게, ''링''이라는 또 다른 전쟁터는 어찌보면 아주 편안한 곳인지도 모른다.

K-1 데뷔 4년 차를 맞은 25살의 루슬란 카라에프. 그에겐 아직 오지 않은 시련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어떤 고난이 닥쳐도 지금처럼 꿋꿋이 헤쳐나갈 거라는 믿음을 준다. 링 위에서 ''혼''의 펀치를 날리는 루슬란 카라에프. 그는 뿌연 포연 속에서 핀 한 송이 장미다. 그의 파이터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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