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한국 언론의 위기를 신뢰의 위기로 진단하고, 오랜 기간 국내외 언론을 모니터링 하며 쌓아온 폭넓은 식견으로 언론이 바뀌지 않으면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 나간다. 또한 어떤 시대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깨어 있는 지성으로서의 저널리즘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언한다.
영국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스페인 엘파이스는 모두가 진보 또는 중도좌파 신문이면서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한다. 이들의 발행부수는 한겨레신문,경향신문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진보신문이 어떻게 주류도 탐독하는 매체가 되어 자국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을까?
'도한 이념화가 민생문제의 소홀을 가져왔다' 주장하지만, 탈이념과 탈정치화로 한국 사회는 더 이데올로기적이고 더 불평등해졌다. 진보성이 구체적인 가치체계로 설명되기보다는 수식어가 돼버렸다. 수구·보수가 과점한 한국의 담론시장을 고려할 때 진보언론이 갖춰야 할 것은 확실한 정체성이다.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중립에 기어를 넣고 한국 사회가 달릴 수는 없다.
책 속으로
영국의 가디언은 노동당이 집권하기 전에는 우군이었지만, 집권하자마자 가장 신랄한 감시자가 됐다. 최근에는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끄는 ‘젊은 보수당’이 전통적인 감세정책을 포기하고 의료복지체계를 확충하겠다고 나서자 우호적인 논조를 폈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신문이 추구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보도 태도를 결정한다. (145쪽, 배신감과 ‘진영 논리’ 배어나는 ‘노무현 보도’)
민주주의적 가치가 자본의 논리에 수시로 압도되는 나라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여론 다양성마저 사라진다면 우리 사회는 장차 어떻게 될까? 선거를 치르더라도 표의 향방이 유권자 자신의 이해관계나 공동체적 가치가 아니라 어떤 텔레비전을 오래 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닌지? 어두운 그림자가 한국 민주주의 위에 드리워지고 있다. ‘만 마리 개가 따라 짖을’ 때까지 끈질기게 짖어야 하는 게 진보언론의 숙명인가. (156쪽, 민주주의 질식시키는 ‘자본의 친위쿠데타’)
세계언론사를 보면 색깔을 잃고 망한 신문은 많아도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신문은 퇴출된 게 드물다. 영국 노동자신문 데일리헤럴드의 비극은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그 신문은 한때 2백만 부를 발행했으나 논조를 우경화하다가 끝내 루퍼트 머독에게 인수되고 말았다. 그 신문의 후신이 바로 영국 언론과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는 황색지 더선이다. (215쪽, 고대 이집트인은 왜 정체성을 중시했나)
가디언은 2005년 베를리너 판으로 전환하면서 사람 얘기와 인터뷰 기사 등을 크게 늘렸다. 심지어 죽은 사람의 인생을 정리해주는 부음기사를 매일 두 면에 걸쳐 싣는 모험을 했다. 얼마나 끌고 나갈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우리나라와 판이한 점은 죽은 사람의 공적은 물론이고 과오까지 가차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가디언 부음기사의 객관성은 정평이 나 있어 ‘관 뚜껑을 가디언이 닫는다’는 얘기까지 있다. (399쪽, ‘잘나가는’ 신문에는 ‘사람 이야기’가 넘친다)
이봉수 지음 | 이음 | 466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