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계란, 참조기, 명태살, 황태포, 고사리, 도라지, 숙주, 시금치, 대추, 밤, 사과, 배, 단감, 두부, 떡국 떡, 약과, 유과….
한 호흡에 다 읽지도 못할 이 긴 목록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매년 차례상 물가 현황을 분석할 때 담는 식재료다.
바꿔 말하면 대다수 국민이 차례상을 차릴 때 구매하는 식재료 목록인 셈이다.
이처럼 20여 가지 재료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례상을 채우는 것이 조상을 섬기는 예(禮)라고 믿는 '어르신'이 많아서, '엄마'와 '며느리'는 명절만 되면 그야말로 허리가 휘고 가계는 휘청인다.
여기에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조율이시(대추, 밤, 배, 감), 좌포우혜(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 등 출처 모를 '규칙'은 골치 아플 뿐 아니라 모처럼 만난 가족·친척끼리 다투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작 전문가들은 "차례상은 원래 간소하게 차린다"고 입을 모은다.
성균관 박광영 의례부장은 27일 "기(忌)제사 상차림은 집안 형편이 좋으면 거하게 차릴 수 있지만, 명절 차례는 술과 안주 몇 가지만 올리면 전통 제례에 맞다"고 말했다.
박 의례부장은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규칙은 주자가례 같은 예서(禮書)에 나오는 게 아니고, 약 40년 전부터 내려오는 민간 관습"이라고 설명했다.
차경희 전주대 한식조리학과 교수도 "과거에 비해 가족 형태나 생활도 바뀌고 음식문화도 달라졌으니 차례 문화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며 "'차례를 왜 지내는지'가 중요하지, '무엇을 차리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현재 통용되는 차례상 기준이 오래된 전통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그는 "원래 제사는 양반의 의무였고 평민들은 제사를 안 지냈는데, 조선 말기에 군역을 피하려고 돈으로 양반을 산 평민이 늘어나면서 홍동백서 등 민간 관습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황 칼럼니스트는 "결정적으로 박정희 정부가 유교 이데올로기를 심으려고 '가정의례준칙'을 발표해 제사 상차림 기준을 정했다"면서 "원래 유교 예법에는 뭘 놔라, 뭘 놓지 말라 하는 게 없다. 떡국 하나만 놓아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엔 설에 보름쯤 놀았는데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중간이 끊겼다"면서 "중국은 춘절(春節), 일본은 마쓰리(祭)라 해 아직도 열흘 안팎을 논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다. 설에는 남녀노소 모두 푹 쉬고 놀아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