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금까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재협상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왔다. 하지만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을 감안했을 때 너무 안일한 인식이란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소녀상 설치를 반대하며 연일 강경책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했던 일본이 논거로 사용한 것은 지난 2015년 12월의 한·일 위안부 합의였다. 일본 정부는 소녀상 설치가 한·일 위안부 합의와 외교관계에 대한 비엔나 협약에 반하는 것이라면서 철거를 꾸준히 요구해 왔다.
하지만 국내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돼 왔다. 일본이 소녀상 관련 자신들의 논거로 이 합의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0억엔이라는 돈이 '진정한 사과'의 의미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영토 및 역사 문제를 두고 갈팡질팡해 왔고 급기야는 졸속 협상 끝에 굴욕적인 12·28 위안부 합의를 이뤘다는 비판이 일었다.
사드 배치의 경우도 이처럼 의견 수렴과정에서 문제가 지적됐다.
정부는 사드 배치를 일관되게 부인하다 지난해 7월 갑자기 배치 결정을 발표했다. 배치 지역인 경북 성주 주민들에 대한 의견수렴이 부족해 촛불집회가 열리는 등 거센 진통이 있었다.
중국과의 외교적 조율도 실패해 고립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사드 배치 발표 이후 중국은 크게 반발했고 외교·경제적 보복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으로 국내 관광·유통산업이 꽁꽁 얼어붙었고 롯데그룹 세무 조사, 한국산 전기차 배터리 규제 등도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두 합의에 대한 '재협상' 여론이 커지는 모양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외교적 약속을 한 것이라면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외교부는 "한치의 흔들림없이 기존 외교방향을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몇달때 반복하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이 연일 이슈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합의 자체를 백지화하자는 말을 꺼내면 공개적으로 우리나라를 망신주려 할 것"이라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고 말하며 정부 입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이 외교관계에서 항상 통용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을 뒤엎고 NAFTA 재협상을 요구하고 TPP에선 탈퇴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잡아먹는다'고 맹비난했던 한·미 FTA에 대해서도 조만간 불똥이 튈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가서 '신의성실의 원칙' 운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되지 않는다.
그 말대로라면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정책 방향에 대비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된다.
한 야권 인사는 "국회 비준도 거치지 않은 미완의 사드 협의나 피해자들의 의견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위안부 합의는 TPP나 FTA와 같은 경제 '조약'보다 결코 무겁지 않은 수준의 약속"이라면서 정부의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탄핵 정국이라는 과도기적 상황과 사드 배치·위안부 합의의 부당한 측면을 고려할 때 얼마든지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최소한 재협상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위안부 합의는 '조약'이 아니고 양자 합의이니 한 쪽에서 부당함을 이야기하면 철회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결국 우리 정부 측의 철학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합의는 인도주의적인 내용인데 충분히 피해자 의사를 존중하지도 않았거니와 반인권적인 내용을 10억엔이라는 돈을 가지고 합의를 한 것 자체가 '무효'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일례로 1999년의 한·일 어업협정의 경우 한국과 일본 간 어업 분쟁이 격화되자 1988년 1월 일본 측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뒤 다시 맺어진 것이란 점도 재협상 주장을 뒷받침한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 역시 "사드 배치의 경우 정당한 국내법적 절차를 밟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이 사드 배치 계획이 없다고 했다가 급작스럽게 발표하면서 국민 설득과정이 생략됐고 배치 지역 국민들의 동의가 없었다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영토와 국가예산에 대한 문제이니만큼 국회 비준이 필요한 사안인데 아직 그도 거치지 않았다"며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물론 이같은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는데는 외교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반발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와 국민의 가치 판단에 따라 외교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경우 이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외교당국의 임무다.
또다른 야권 관계자는 "탄핵정국과 야권의 대선승리가 점쳐지는 상황에서, 차라리 지금부터 재협상까지 염두에 두고 여러가지 시나리오와 대책을 모색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