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3000년 역사, 400년 주기로 살피다

<역사는 디자인된다: 세계사의 큰 줄기를 따라 구성해 본 디자인의 역사>

20세기 후반 환경 문제와 각종 사회 문제가 대두되면서 디자이너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다. (……) 디자인의 본질과 뿌리는 공동체와 사용 가치에 있다. 디자이너가 사용성을 외면하고 스타일링만 지향하면 결국 디자인도 실패하고 스스로의 신뢰도 추락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전문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에게 질문해야 한다. 디자인의 가치가 무엇인가. 교환 가치에 매몰되지 않았는가. 사적인 문제와 공적인 문제를 혼동하지 않았는가. 나아가 디자이너가 만든 디자인이 현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되물어야 한다. 246~247쪽에서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디자인이란 건 무엇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미는 예술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경향신문에서 오랫동안 아트디렉팅을 하고, 수많은 정보를 간략한 그래픽으로 표현해 온 바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윤여경은 그가 잘하는 '압축' 능력을 통해,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인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유구한 인류 문화의 흐름 속에 존재한 디자인의 뿌리를 발견함으로써, 외부에서 이식될 수 없는 주체성과 정체성을 심고 가꾸자는 제안이다. 특히 세계사의 큰 줄기를 따라 구성한 기다란 디자인 역사 연표는 디자인적 성실성은 물론 인류 역사에 대한 빛나는 통찰력을 보여 준다.


저자가 소개한 연표의 제목은 '역사 연표'가 아니라 '디자인 역사 연표'다. 그린 목적이 인류사의 이해가 아닌, 디자인 역사와 문화의 이해이기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에서 다룬 역사의 본질과 인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후반부에서는 시대별 예술과 디자인의 시공간적 특징을 분별한다. '디자인 역사 연표'를 통해 시각(그래픽)적 역사를 밝힘으로써, 저자는 역사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정체성과 소명의식을 환기한다.

B.C.550년부터 현대까지 약 2500년 동안, 회색 파동은 400년 단위로 오르락내리락하며 큰 산 네 개를 형성한다. 상승할 때는 이념과 종교 등 관념이 중요해지고, 하강할 때는 생존과 안전 등 현실적 삶이 중요해진다. 올라가는 흐름에서는 이상적인 태도가, 내려가는 흐름에서는 현실적인 태도가 강조된다. 디자인 모형의 흐름처럼 상승에서는 감성(엔트로피)이, 하강에서는 이성(네트로피)이 작동한다. 디자인 모형의 순환 구조가 연표에서는 상승과 하강의 파동으로 표현되었다. 172쪽에서

디자인 현상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면서, 저자는 디자인에 내재한 시대적 영향력에 주목한다. 시대상을 대변하는 디자인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괴로움과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이 있다. 물론 두 가지의 선후는 닭과 달걀처럼 구분하기 어렵지만, 저자의 관점에 따라 예술을 "문제 제기의 행위"로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행위"로 이해해 본다면 확실히 역사적 난제의 해결은 디자이너 손에 달려 있는 듯하다. 문맹률이 높았던 19세기 말 노동자들 대상으로 그림 문자 '아이소타입'을 개발한 오토 노이라트를 사회학자이자 디자이너로 볼 수 있지만, 달리 이해해 보면 모든 디자이너는 사회학적 성격과 임무를 띤다.

아이소타입은 19세기 말에 새롭게 발명된 문자다. (……) 오토 노이라트의 노력이 탄생시킨 아이소타입은 현재 공항이나 올림픽 등 국제 행사에 유용하게 쓰인다. 디자이너들은 보편적인 이미지 글자인 아이소타입을 다룸으로써 언어를 초월한 소통을 할 수 있다.
문자를 알면 사고의 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주체적인 사고를 추구하게 된다. 실제로 문자를 배운 사람들은 더 높은 삶의 질을 추구했다. 합리적 이성을 믿고 비판 정신을 지니게 되어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한다. 이런 태도를 근대정신 혹은 근대성이라고 말한다.- 275쪽에서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주체성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정체성을 "타인과의 맥락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관계적 접근"으로 나누며, 경쟁을 위해서는 주체성을, 협업을 위해서는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작금의 디자인 교육은 주체성을 찾는 데 적극적인 반면 이론적/역사적 정체성을 찾는 노력은 빈약하기에, 주체적 디자인으로 무장하고 발딛은 새내기 디자이너가 디자인 현장에서 겪을 괴리를 염려한다. 이때 다시금 역사 공부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 미래의 나와 연관 짓는 역사 공부는 정체성 찾기의 좋은 연습이 되며, 클라이언트나 사회 등 외부 요인과의 관계 속에서 고민하는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인 입사 의식이 된다. 나아가 "적절성과 협업을 지향하는” 디자인의 참기능을 잘 알고 활용하는 디자이너는 “흩어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주요한 역사적 역할을 감당하게 될 터다.

윤여경 지음 | 민음사 | 380쪽 |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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