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조직이 자행한 국정농단 사태 이후 열세 번째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본 집회에 앞서 '광장정치를 둘러싼 정세와 대응전략'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발제를 맡은 배성인 한신대 교수(정치학)는 "박근혜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지난 12월 9일 이후 정세는 특검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라는 사법적 질서와 권력으로 수렴되는 상황"이라며 "이재용의 구속영장 기각과 김기춘·조윤선의 구속을 통한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연출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형식적 법치주의에 갇혀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촛불민심을 반영해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제도정치는 대선의 정치일정에 맞춰 정세를 수렴하려는 속내를 보이고 있다"며 "촛불항쟁을 등에 업은 그들이 그 성과를 사유화하거나 자신들의 전리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꼴 사나운 행태를 연출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날 토론회가 끝난 뒤 따로 만난 배성인 교수에게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촛불집회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냐'고 묻자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 촛불항쟁은 지난해 10월 29일 민중총궐기를 통해 촉발됐고, 계속 범국민대회 중심으로 흘러갔다. 돌이켜보면 초기 집회에서는 박근혜 '탄핵'이 아니라 '퇴진'을 구호로 내걸었다. 탄핵 흐름으로 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광장에서는 박근혜에게 '정치적으로 대답하라'고 요구했는데, 박근혜는 '법과 절차를 밟겠다'고 했다. 이후 광장에서 '법과 절차를 밟으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받아쳤다. 교묘하게 피해간 것이다."
배 교수는 "그렇게 결국 탄핵이라는 절차를 밟을 수밖에는 없는 상황까지 왔는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퇴진보다 탄핵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며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면서 사람들이 '이젠 탄핵이 되겠구나'라는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감성적인 전망을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고 이튿날인) 지난 12월 10일부터는 광장에 나오는 시민의 숫자가 줄었다. 지금까지 촛불이 계속 줄어든 이유는 탄핵 국면을 맞으면서 1차 과제가 끝났다고 여기는 데 있다. 그렇다보니 계속 특검 수사 결과를 지켜보거나,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 "탄핵정국, 보수진영 구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
이에 대해 배 교수는 "(보수진영의 구상에) 거의 근사치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촛불들은 보수세력의 반격을 등한시하거나 놓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예를 들어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구속 영장 기각) 같은 경우나, 박사모 등의 맞불집회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를 간과하고 있는 점 등이 그렇다. 그들은 한 번 위축됐을지 모르겠으나 꾸준히 반격해 왔고, 그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동안 안일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배 교수는 앞서 이날 토론회 발제를 통해 "문제의 핵심은 스스로 주권자임을 확인하면서 광장에 나온 이들이 '주체인 듯 주체 아닌 관객 같은' 촛불이라는 것"이라며 "광장이 내용을 생산하지 않고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요청하자 "당초 광장에 나온 촛불들의 입장은 구체제 청산, 전반적인 사회 구조 개혁이었다. 그런데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제도정치 일정에 끌려가다 보니, 대권주자들의 입만 바라보는 상황이 돼 버렸다"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촛불의) 양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광장에 많이 나올수록 그들(대권주자들)에게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촛불 숫자가 줄어드니 대권주자들은 광장의 목소리가 작아진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이로 인해 이들이 다시 예전으로 회귀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부 대권주자는 여전히 광장의 요구를 투영하려 하는데, 일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미 관계 등 외교를 고려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가 처음 얘기하던 사회구조적 개혁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만 물러날 경우 기존 체제는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현 체제 자체를 뛰어넘는 것이 절박한 과제로 다가온다."
◇ "내 삶의 현장에서 내 목소리 내야만 정치적 주체가 된다"
이에 대해 배 교수는 "이번 촛불항쟁을 두고 시민혁명 내지는 명예혁명이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말로 운을 뗐다.
"명예혁명일 경우 박근혜만 물러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혁명의 경우 제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6월항쟁으로 들어선 87년 체제보다는 진일보한 제도적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제도적 개혁은 흔히 말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에 만족할 것인가? 이건 사실 사회구조 개혁이 아니다. 일부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이고 부당한 법·제도를 바꾸는 것일 뿐, 지금의 체제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크게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어 보인다."
"사회구조 개혁을 외면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이 각 대선후보자들의 선거캠프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배 교수의 설명이다.
"선거캠프에 있는 사람들이 광장의 촛불을 별로 눈여겨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어차피 대선 국면에 들어서게 되면 다 빨려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현실도 그렇다. 우리는 대선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전망과 기획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렵게 될 것이다."
그는 "(서울의 경우) 촛불항쟁을 광화문광장에만 한정짓지 말고 넓히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며 "방방곡곡에 뿌리내린 수많은 조직을 활용해 지역마다 논쟁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든다면 효과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제안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내 삶의 현장에서 키워 가는 민주주의다. 광장에서는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지역에 가야만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사람들이 자신과도 맞닿아 있는 삶이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관심을 갖게 되면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가질 텐데,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라고 본다. 그런 방식으로 운동이 새롭게 전개된다면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촛불항쟁이 우리네 일상의 삶과 현실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치적인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 배 교수의 지론이다.
"시민들이 각자 삶의 현장에 있으면 정치적 주체가 되는데, 광장에서는 하나의 점으로만 머무는 분위기다. 결국 '내' 삶의 현장에서 '내' 목소리를 내야만 정치적 주체가 되고, 이를 토대로 광장의 민주주의도 다질 수 있다. 다가올 설연휴에 자신의 삶을 가족들에게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서 관심을 촉구하는 것도 민주주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가족들에게는 굳이 배경을 설명하지 않아도, 삶의 현장에 대해서만 얘기해도 공감을 얻고 더 단단한 관계를 다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