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고공행진의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가드 김태술(180cm)이 합류해 지난 시즌부터 견실한 활약을 펼친 최고 외인 리카르도 라틀리프(199cm), 주장 문태영(194cm) 등과 호흡을 맞춘 게 컸다. 사령탑 3년차 이상민 감독(45)이 마침내 '페르소나'를 찾아 팀 조직력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선수의 '깜짝 활약'이 없었다면 삼성의 1위도 쉽지 않았을 터. 바로 올 시즌 프로농구 최고의 히트작인 '괴짜 용병' 마이클 크레익(26 · 188cm)이다. 2라운드 7순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선수가 대박을 쳤다. '크끼리' '크동석' '포크레익' 등 팬들이 다투어 별명을 지어줄 만큼 인기다.
120kg에 육박하는 덩치의 크레익은 이상민 감독의 현역 시절 '영혼의 파트너'였던 조니 맥도웰(194cm)을 떠올리게 한다. 이 감독은 '탱크' 맥도웰과 대전 현대(현 KCC)에서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정규리그 3번, 챔피언결정전 2번 우승을 합작했다.
일단 이 감독과 크레익의 궁합도 좋다. 이런 기세라면 왕년 맥도웰과 함께 이뤘던 우승 신화도 불가능한 게 아니다. 과연 크레익은 이상민 감독에게 '제 2의 맥도웰'이 될 수 있을까. 사령탑에 오른 이 감독에게 새로운 '영혼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 삼성의 전반기 1위를 이끈 이 감독과 크레익을 CBS노컷뉴스가 만났다.
▲"크레익은 모험이었다"
올 시즌 크레익은 전방위적 활약을 펼치고 있다. 공수 전 부문에서 2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평균 득점 15위(14.9점), 리바운드 14위(6.5개), 도움 8위(4.8개), 가로채기 13위(1.4개), 블록 20위(0.5개) 등이다. 정규 경기의 절반 정도인 평균 23분23초만 뛰고도 세운 기록들이다. 30분 이상을 뛰면 전 부문 '톱10'도 가능할 법한 기록이다.
120kg에 육박하는 덩치로 골밑에서 맹위를 떨치는 모습은 10여 년 전 맥도웰과 흡사하다. 맥도웰도 상대적으로 작은 키였지만 110kg 가까운 힘을 앞세워 골밑을 지배했다. 크레익은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병행했을 만큼 육중한 체구로 림을 부술 듯한 덩크는 팬들을 열광시켰다. 간간이 나오는 덩크 실패에 대한 민망한 표정은 웃음까지 선사했다.
크레익이 가세하면서 삼성은 화룡점정을 이뤘다. 우직한 라틀리프와 문태영, 김준일(202cm)이 버틴 골밑에 다재다능한 크레익은 윤활유 역할을 해줬다. 외국 선수 도움 1위가 말해주듯 절묘한 패스로 동료들을 잘 살려줬다. 공격이 풀리지 않을 때면 외곽에서 해결사 능력까지 선보였다. 삼성이 1위를 할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이런 크레익을 눈여겨본 인물이 이상민 감독이었다. 크레익의 농구 센스를 믿었다. 당초 이 감독도 반신반의였다. 이 감독은 "사실 우리로서는 모험이었다"면서 "너무 뚱뚱해서 빠른 한국 농구에 적응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고 드래프트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당시 트라이아웃에서 느낌이 좋았다. 이 감독은 "동영상으로만 보다가 실제 경기 모습을 보니 의외로 유연하고 감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뜻밖의 장점들이 많아서 2라운드 7순위에 마커스 블레이클리, 에릭 와이즈 등 언더사이즈 빅맨들이 있었지만 승부를 걸었다"고 강조했다.
크레익에게 이 감독은 은인이나 다름없다. NFL에 진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두 아이(당시 아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의 아빠가 자칫 실업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 크레익은 "드래프트 당시 부모, 동생 등 가족이 전부 와 있었는데 지명을 받고 모두 기뻐했다"면서 "감독님께 정말 감사하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맥도웰도 현대에서 2라운드 19순위로 뽑혀 큰 기대가 없었으나 '신의 한 수'가 됐다.
▲"속이 타지만 얼마나 뛰고 싶었으면…"
하지만 '크레익 효과'의 반대급부도 있다. 농구와 병행했던 NFL의 이른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몰라 속을 썩인다. 잘할 때는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하는 최강의 무기가 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무리한 '나홀로 플레이'를 펼치다 실책을 남발한다.
크레익은 올 시즌 실책 98개(평균 3.2개)로 리그 전체 2위다. 1위는 제임스 메이스(창원 LG)로 116개(평균 3.9개), 그러나 메이스는 평균 35분을 넘게 뛴다. 크레익이 메이스처럼 12분 정도를 더 뛰면 단연 1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에서도 실책 2위는 35분 가까이 뛰는 라틀리프로 크레익보다 30개나 적다.
다재다능이 독이 되는 경우다. 크레익은 지난달 30일 부산 kt전에서 시즌 첫 트리블더블(22점-10리바운드-10도움)을 기록할 만큼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7경기에서 실책이 29개나 됐다. 특히 전반기 막판 2연패를 당할 때는 모두 4개씩의 범실을 기록했다.
이 감독도 골머리를 썩는다. 크레익에 대해 이 감독은 "골밑에서 자기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혼자서 공을 몰고 슛을 던진다"면서 "막히면 그때서야 패스를 하다 실책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타적인 플레이를 주문하는데 종종 무리할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삼성이 시즌 초반보다 기세가 떨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크레익이 공을 운반하고 리딩까지 맡다 보니 가드진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것. 김태술 역시 KCC에서 볼 소유의 기회가 적어 플레이가 위축됐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이 감독은 다그치기도 하지만 이해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 감독은 "속은 타지만 본인도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나도 선수 생활을 했지만 2, 3쿼터 20분 정도만 뛰면 답답할 것"이라면서 이 감독은 "더군다나 20대 중반 한창 때인데 얼마나 뛰고 싶겠냐"고 반문했다. 이어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그래도 미팅에서 세게 얘기를 하고 나면 확실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덧붙였다.
크레익도 반성하고 있다. 삼성 선수단은 19일 전체 회식을 하면서 전반기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며 푸는 시간을 보냈다. 크레익도 "농구는 업다운이 있는 스포츠"라면서 "올스타 휴식기 전 2연패를 했는데 지금은 흐름이 다운(DOWN)이지만 다시 흐름이 업(UP)으로 바뀔 것이고 이 흐름을 잡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승+다이어트로 꼭 재계약할게요"
이런 까닭에 아직 이 감독은 크레익에 대한 평가가 후하지는 않다. 특히 현역 시절 함께 호흡을 맞췄던 맥도웰에 비해 아직 멀었다는 것.
이 감독은 "맥도웰에 비교해 크레익은 아직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물론 소질은 충분하다. 이 감독은 "영리하고 BQ(농구 아이큐)는 좋다"면서 "또 순간적인 패스와 도움 능력은 맥도웰보다 낫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하지만 맥도웰은 스피드와 함께 골밑 움직임이 탁월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 공이 없는 움직임에서는 단연 발군이었다"고 덧붙였다. 맥도웰은 골밑 파괴력도 엄청났지만 이 감독과 합작한 2대2 플레이가 압권이었다. 이 감독이 스크린을 해주고 빠지는 맥도웰에게 배달한 송곳 패스는 일품이었다.
이 감독과 맥도웰은 1997-98시즌부터 2연 연속 리그 MVP와 외국 선수상을 받았다. 이 감독이 14.3점 5리바운드 6.2도움-14.4점 4.9리바운드 7.9도움을, 맥도웰이 27.2점 11.8리바운드-24.6점 13.5리바운드로 2연 연속 통합 우승을 견인했다. 그야말로 '영혼의 파트너'였다. 다만 1999-2000시즌에는 챔프전에서 SK에 져 아쉽게 통합 3연패는 이루지 못했지만 이상민-맥도웰 콤비는 역대 최고라 하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맥도웰과 비교되는 것 자체로도 기분이 좋다. 크레익은 "15, 6년 전이면 나는 10살 무렵이었다"면서 "사실 맥도웰의 경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크레익은 "대단했던 감독님과 호흡을 맞춰 여러 번 우승한 선수와 비교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면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제 2의 맥도웰'이 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이 감독은 크레익이 대해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무리한 공격을 할 때가 많다"면서 "또 항상 몸이 너무 무거워서 부상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대 집중 견제를 슬기롭게 이겨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크레익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크레익도 진지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크레익은 '맥도웰처럼 이 감독에게 우승을 안겨주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절대적으로(absolutely) 그렇게 하고 싶다"면서 "맥도웰처럼 감독님과 우승을 한다면 정말 뜻깊을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감독님이 결정할 문제지만 꼭 살을 빼서 재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덩치에 맞지 않는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단언컨대 그 미소만큼은 맥도웰보다 낫지 않았을까.) '제 2의 맥도웰'을 꿈꾸는 크레익과 또 다른 '영혼의 파트너'를 바라는 이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