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블랙리스트로 되살아난 '유신의 망령' ② "어느날 갑자기 빨갱이가 됐어"…대를 이은 공안 통치 ③ 전태일 이후 47년 "유신시대 마인드로 박근혜표 노동탄압" ④유신시대도 없던 '복면시위 금지법' 등장 "가만히 있으라!" ⑤ "언론은 '관보'일 뿐"…더 교묘해진 보도통제 (계속) |
"자유 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동아일보 기자들,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중)
40년 전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던 이 선언이 최근 다시 언론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이와 같은 언론탄압이 박근혜 정부에서도 좀체 끊이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 "부정선거…중앙정보부가 보도하지 말라고"
놀랍게도 차 안에서는 농민 20~30명이 발견됐다. 이들은 시골에서 영문도 모른 채 공화당 탑차에 올랐다 별안간 사고를 당한 것.
해당 차량이 향하던 장터에서는 김종필 당시 공화당 부총재의 박정희 후보 지원 연설이 있었고, '청중 수 집계'는 선거 판세를 보여주는 주요한 잣대였다.
당시 사건을 취재한 입사 4년 차 문영희(74) 전 동아일보 기자는 '청중 강제동원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송고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음 날 지면에서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최근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회사 측의 보고를 받은 중앙정보부(중정)가 보도를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라며 "보도통제를 넘어 명백한 부정선거였다"고 성토했다.
이어 "그 날 화가 나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와서 편집국장 책상을 확 뒤집어버렸다"면서 "편집국장이 만날 중앙정보부에서 전화 받고 하던 게 기억이 나 전화기까지 깨버렸다"고 회상했다.
◇ 광고 협박 안 먹히자, 폭력배로 '진압 작전'
문 전 기자는 "중정은 대형 광고주들을 불러다가 각서를 받고 광고를 빼곤 했다"면서 "여기에 중정에 촌지를 받아먹거나 겁먹은 이들이 언론사 간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 투쟁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동아일보의 경우 1975년 3월 경영진이 폭력배를 동원해 기자 등 113명을 편집국에서 끌어내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윗선'으로는 유신 정부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광고가 끊겨 '백지 투쟁'하던 동아일보에는 시민들의 자발적 '격려 광고'가 이어졌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조선일보 등 전국으로 퍼지고 있었다.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40년 뒤인 지난 2015년,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000만 원 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해직언론인 상태다.
◇ 박근혜표 보도지침…언론자유 '최악'
"공영방송 인사와 제작에 관여하지 않겠다"던 후보 시절 공약(公約)은, KBS·MBC 등에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장을 임명하면서 그야말로 공약(空約)에 그쳤다.
또한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에 언론사 간부들을 끌어들이면서 언론의 견제·비판 기능을 잃게 했다. 그러면서 상당수 언론은 권력에 '알아서 기는'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직후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하필이면 (대통령이) KBS를 봤네. 한 번만 도와주시오"라며 공영방송에 '보도지침'까지 내린 정황이 공개됐다.
'정윤회 문건'이나 '비선실세'를 취재하던 언론사에 대해서는 "선제적으로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을 해야 한다고 청와대가 지시한 정황이, 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권언유착과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던 MBC 언론인 6명은 여전히 해직 상태고, YTN 해직 언론인 3명 역시 3000일째 현업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박근혜 정부 4년 만에 180개국 중 70위로 역대 최하위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원로 언론인의 가슴은 타들어 간다. 문영희 해직기자는 "박 씨 왕조에게 언론이란 건 '관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그러니까 촛불이 일어나고 하는 것 아니냐"라고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