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 현장·농장에 음식배달 오토바이, 계란수집상 드나들어…방역 '구멍'
축산대기업은 '나 몰라라' 방관, 소독·매몰비용은 모두 지자체가 부담
작년 늦가을 국내에 유입된 H5N6형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는 이후 파죽지세로 확산해 전국 닭·오리 농장을 휩쓸었다.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고고(高高)병원성인 데다가 전파 속도마저 총알처럼 빨랐다.
작년 11월 전남 해남의 산란계 농장과 충북 음성의 육용 오리 농장에서 발생한 이후 50일 만에 3천33만 마리 이상의 가금류가 살처분됐다.
과거 AI로는 가장 피해가 컸던 2014년 1∼7월 1천396만 마리의 2.2배에 달하는 살처분 규모다.
전국적으로 닭은 6마리 중 1마리꼴로, 오리는 4마리 중 1마리꼴로 살처분됐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AI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역 총력전'을 펼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허가 계란 수집 차량이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은 채 전국 곳곳을 누볐고, 음식점 오토바이는 방역망을 유유히 뚫고 살처분 현장에 음식을 배달했다.
부실한 초동대처 탓에 30개들이 한 판에 4천∼5천원하던 계란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돌아갔다. 자식처럼 키운 닭·오리를 매몰 처리한 농민들의 억장도 무너져 내렸다.
◇ 고고병원성 몰랐나…늑장대처로 골든타임 놓쳐
H5N6형의 AI 바이러스의 국내 유입이 확인된 것은 작년 11월 11일이다. 민간대학 연구팀이 충남 천안 봉강천에서 채취한 시료에서 이 바이러스가 검출된 것이다.
중국에서 10명이 숨지는 등 인명 피해까지 초래한 바이러스인데도 축산 방역 당국의 태도는 느긋했다. 가금류 사육 농장에서 AI가 발생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였다.
닷새 뒤인 작년 11월 16일 전남과 충북의 가금류 사육 농가에서 AI가 발생했다. 정부는 그제야 방역대책본부를 차렸다. 고고병원성 바이러스 유입이 확인된 지 엿새 뒤에야 비상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충남대 수의과학대 서상희 교수는 당시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신고가 접수되는 시점이라면 바이러스가 엄청나게 방출되는 단계"라고 우려했다. 이 걱정대로 이번 AI 피해는 사상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정부의 부실한 대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AI 관련 범정부 관계장관 회의가 열린 것은 바이러스 유입이 확인된 후 한 달이나 지난 작년 12월 12일이다. 이때까지 매몰 처리된 가금류는 1천234만8천 마리로, 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를 눈앞에 둔 때였다.
그 이후 나흘 만에 살처분 규모가 1천783만3천 마리에 달하자 위기 경보는 그제야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됐다. 정부의 늑장대처 속에 무등록 계란 운반차량은 농장 곳곳을 드나들었고 AI 바이러스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나갔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방역 조직이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도록 축산법을 개정해 조직을 전문화해야 하며 농림축산식품부에 국(局) 단위의 AI 전담 조직을 설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웠다.
◇ 밤잠 못 자며 열심히 했지만…지자체 방역 정책 '구멍'
AI를 전파하는 매개체로는 철새가 꼽힌다.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날아든 철새를 통해 유입된 바이러스가 사람·차량을 통해 빠르게 퍼졌다는 게 방역 당국의 역학조사 결과이다.
유입 초기에 사람·차량을 제대로 통제했다면 AI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자체 방역망에 구멍이 뚫리면서 AI 방역 매뉴얼은 있으나 마나 한 휴짓조각이 됐다.
음식점 배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살처분 현장을 드나드는 등 외부인의 출입조차 관리되지 않을 정도였다. 농장 주변 이동 통제초소가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계란 중간유통 상인들도 산란계 농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차량 소독을 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를 다니며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차단 방역에 나서야 할 지자체도 허점을 드러냈다. 뒤늦게 단속에 나섰다가 무등록 계란 수집 차량을 적발했다. '사후약방문'식이었다.
사료 차량이나 가축 운반차량도 제때 통제되지 않았다. 방역 당국은 충북 음성·진천과 경기 포천 등 일부 지역의 경우 사료·가축 운반차량을 통한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 "방역은 남의 일" 손 놓은 축산대기업
이번을 제외하고 AI 피해가 가장 컸던 2014년 1∼7월 전국적으로 살처분된 가금류는 1천396만1천 마리에 달한다. 이때 정부가 축산대기업과 농가에 지원한 살처분 보상금과 생계소득 안정자금, 입식 융자금은 1천934억 원이다.
작년 늦가을 시작된 이번 AI로 인한 살처분 규모는 4일 오전 0시 기준 3천33만 마리이다. 보상금 등 지원돼야 할 예산이 4천억 원을 훌쩍 넘어설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철새가 날아들지 못하게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축산대기업도 차단 방역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개인 축산농들이 직영하는 농장에 비해 대기업에 닭·오리를 납품하는 농가의 방역이 소홀한데, 사실상의 닭·오리 소유주인 이들 대기업이 손을 놓고 있다는 점에서다.
AI가 발생할 때마다 이들 기업이 방역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거나 소홀하다는 비판은 여지없이 제기된다.
주변 철새 도래지를 소독하거나 소독약을 사 농장에 제공하는 것은 지자체의 몫이다. 살처분 매몰 비용마저 예산에서 투입된다. 축산대기업이 지는 책임은 거의 없다.
이들의 무책임한 자세로 인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피해가 초래된다며 가축방역세를 물리자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축산대기업 주변으로 가금류 사육 농장이 밀집되고 사육 마릿수가 대규모인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10만∼20만 마리를 웃도는 농장이 과거보다 많아진 데는 지원금을 주며 현대화를 부추긴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며 "폐업 지원금을 줘서라도 사육 규모와 농장 밀집도를 낮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살처분 매몰지를 확보하는 농가에 한해 축산업 허가를 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덴마크 등 유럽의 축산 강국들은 가축 마릿수에 맞춰 분뇨를 자연 친화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토지를 농장 주변에 마련해야 허가를 내주는 데서 착안한 아이디어다.
경기도는 땅을 빌려 축산업을 하는 농가라 하더라도 살처분 부지를 확보한 농가에만 신규 축산업 허가를 내주도록 축산법 개정을 정부에 건의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