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국정농단 사태가 불러온 방송연예가의 봄 ② 문화예술계 뒤흔든 '블랙리스트' 왜 위험할까 ③ '세대교체' 바람 속 웃고 운 아이돌 ④ 잘나가던 한류의 '한한령' 수난시대 ⑤ 표현의 자유 빼앗긴 영화계에도 봄은 오는가 ⑥ 성추문 속출…'권력'에 맞선 '폭로' ⑦ 판타지에 빠진 드라마…현실과 닮아가는 예능 ⑧ "본때 보여야"…숱한 폭로로 드러난 '언론 수난사' <끝> |
이제는 온 국민이 다 알 정도로 유명인사가 된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지난 9월 20일, 한겨레의 보도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에 앞서 7월 26일, TV조선은 미르재단이 두 달 만에 대기업에서 500억 원 가까운 돈을 모았다며 그 '수상한 배경'에 의문을 제기했다.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 씨 일가의 '국정농단'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최 씨의 태블릿 PC를 입수한 JTBC의 특종 이후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이처럼 '언론'이었다.
올해는 모처럼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취재 경쟁을 벌여 국정농단의 실체를 한 꺼풀씩 벗겨낸 덕에 언론이 새삼 그 존재 가치를 조명받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언론의 그늘이 드러난 해이기도 하다. 2012년 170일 파업 당시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를 "증거 없이 해고"했다는 증언이 담긴 '백종문 녹취록'과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의 보도 방향 지시가 포함된 '이정현 녹취록'에 이어, 청와대에 비판적인 언론을 어떻게 길들였는지 나타난 '김영한 비망록'까지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였다. 바로 '권력의 강력한 언론통제 의지'다.
◇ "증거 없이 해고시켰다"… '백종문 녹취록'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는 지난 2012년 김재철 사장 퇴진 및 공쟁방송 쟁취를 내걸고 진행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본부)의 170일 파업 중 해고됐다. 당시 해고된 이들이 대부분 현직 노조 간부나 기자협회장 등이어서 두 사람의 해고는 그때도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두 사람이 해고될 당시 백 본부장은 편성제작본부장으로서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인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MBC 안광한 현 사장은 당시 부사장으로 인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백 본부장은 "오늘날 국민들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지게 된 많은 것을 MBC가 제공한 부분도 크다. 지금은 그런 거 전혀 못하게 다 통제를 하고 있는 상태", "조직적인 정비를 올해 안에 해야 한다. 경력사원 뽑을 때 인사검증을 한답시고 지역도 보고 여러 가지를 다 봤다" 등의 발언으로 '프로그램 통제'와 '사원 선발 시 지역 검증'을 실토하기도 했다.
청와대 등 권력이 직접 개입한 사례는 아니지만, 국민을 주인으로 삼는 '공영방송' MBC에서 소수의 경영진이 노조를 배척하고자 최고 징계인 '해고'까지 감수했다는 점, 파업 이후로도 MBC의 체질을 바꾸고자 프로그램 통제, 사원 지역 검증 등을 펼쳐왔다는 점에서 '백종문 녹취록'이 주는 파장은 컸다.
◇ 청와대의 보도 압박 드러난 '이정현 녹취록'
이 전 수석과 KBS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통화 내용을 들으면, 이 전 수석이 얼마나 집요하게 KBS 보도에 항의하는지 알 수 있다. KBS는 2014년 4월 21일과 30일 뉴스에서 해경 비판 보도를 각각 7건, 8건 내보냈다. 이를 두고 이 전 수석은 "지금 국가가 어렵고 온 나라가 어려운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 그 해경하고 정부를 두들겨 패는 게 맞나"라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또 이 전 수석은 "정부를 이렇게 짓밟아 가지고 되겠느냐,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데도", "얼마든지 앞으로 정부 조질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 가 가지고 이런 문제 있으면 (보도)하더라도 지금은 좀 봐주세요", "하필이면 또 세상에 (대통령님이) KBS를 오늘 봤네, 아이~ 한번만 도와주시오"라며 특정 리포트 내용을 바꾸거나 다시 녹음해 달라고까지 했다.
'이정현 녹취록'은 대언론 창구를 맡고 있는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보도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구체적인 보도 방향을 제시한 중요한 '증거'였다. 또, 이 대화에서 "솔직히 우리(KBS)만큼 많이 도와준 데가 어디 있나"라는 말이 나올 만큼 청와대의 '언론통제' 시도가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점에서도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 청와대 '언론탄압' 종합선물세트 보여준 '김영한 비망록'
김영한 비망록에 나타난 대표적인 피해자는 세계일보, 일요신문, 시사저널, KBS와 일본 언론 산케이신문이다. 2014년 11월 '정윤회 문건'을 특종보도한 세계일보에 청와대는 "적에 대하여는 적개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항의전화는 기본이었고, '언론의 무책임 보도'에는 "시정 요구하며 계도토록 해야 한다"는 구절도 있었다.
대통령 비선실세 등을 취재해 온 일요신문과 시사저널에도 "그대로 두면 안 된다"며 정정보도, 언론중재위 제소, 고소고발 및 손배 청구 등 "불이익이 가도록 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갔다. 두 언론사에 대해 "끝까지 밝혀내야-피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야. 선제적으로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 정부, 홍보수석실 조직적, 유기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쓰인 메모는 청와대 언론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세월호 보도개입이 밝혀져 길환영 전 사장이 사퇴하고 잠깐의 '봄'을 맞았던 KBS 역시 '김영한 비망록'에 주시해야 할 언론사로 기록돼 있었다. 청와대는 사장 선임을 앞둔 KBS이사회의 주요 일정을 체크하고, KBS 우파 이사들의 성향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추적60분-천안함 편'에 대해 방통위 제재가 잘못됐다는 1심 판결이 나오자 항소를 주문한 대목,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 관련 보도와 세월호 국조특위에서 세월호 당시 대통령 행적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한 KBS 보도를 언급한 부분도 있었다.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을 다룬 산케이신문에 대해 "잊으면 안 된다. 응징해줘야. 리스트 만들어 보고, 추적하여 처단토록"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또 "국가원수 모독은 용납될 수 없다"며 "명예훼손 사벌 엄단"을 지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MB 정권 때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했다가 해고된 YTN 해직자(권석재·노종면·우장균·정유신·조승호·현덕수)에 대해, 해고무효소송 대법원 판결 이후 동향을 파악하라는 내용의 메모도 있어, '언론장악'의 피해자들마저 감시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언론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현장의 언론인들에게 돌아갔다. KBS·MBC 취재진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 현장에서 수모를 겪기 일쑤였다. "니들도 공범", "보도 안 할 거면서 왜 왔느냐" 등의 비난을 듣는 것은 기본이었고, 시민들의 반발이 가장 컸던 MBC의 경우 MBC 로고가 없는 마이크를 들거나 크레인에 올라가 현장을 중계하는 일도 있었다.
자사를 비판한 구성원들에게 여전히 징계성 인사가 이뤄지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MBC 기자들은 실명을 걸고 보도국 수뇌부와 경영진을 비판하는 글을 올려 '개선'과 '변화'를 촉구했다. PD들 역시 로비 피케팅으로 '보도참사'에 대한 사측의 반성을 요구 중이다.
KBS 양대 노조는 지금과 같이 정치적으로 치우칠 수 있는 사장을 뽑지 않도록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바꾸는 '방송법 개정안'(언론장악 방지법) 통과를 위해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어제(26일)는 KBS 15년차 이상 기자들이 연명 성명을 내어 고대영 사장 사퇴를 주장했다. 그러나 내부 구성원들의 이같은 움직임에도 두 공영방송 경영진은 이렇다 할 '변화'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