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작성하고 문체부가 관리했다는 '살생부' 격의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 성향의 문화 예술인들을 한 데 묶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고 차별을 가한 반민주적 유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블랙리스트 건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다루는 박영수 특검팀의 우선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이미 문화예술 단체들로부터 고발을 당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특히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이 26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를 직접 봤다"고 작심한 듯 김기춘 전 실장을 거명하며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청문회에 출석했다면 김 전 실장의 따귀를 때리는 사고를 일으킬 수 있겠다 하는 걱정을 했다"며 "내부 고발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백안시하지 않는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전 장관의 말처럼 최순실 국정농단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내부 고발자'의 역할은 실제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조직 내 불의와 부조리를 호루라기를 불어 외부에 알리는 사람으로 '휘슬 블로어(Whistle-blower), 또는 공익 제보자' 등으로 불리는 '내부 고발자'는 용기있는 정의의 파수꾼이지 결코 조직의 배신자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박근혜 정부의 치부를 담은 비망록을 남긴 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 정윤회 문건 당시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故 최경락 경위도 최순실 게이트에서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정부 부처 장차관과 고위 공무원 등 엘리트 공직자들은 최순실 국정농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부역자로 낙인 찍혔다.
이처럼 책임 있는 공직자들이 민간인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관여했는데도 대한민국의 거대한 공직사회는 눈과 귀를 닫고 침묵하고 있다.
지금은 용기와 능력, 양심을 가진 젊은 공직자들이 더 크게 '휘슬'을 불어야 하는 상황이다. 호루라기가 있는데도 불지 않는다면 양심을 거스른 '거짓 침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과 정치권은 '휘슬 블로어'들을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
이들은 혐의 사실에 대해 '아니다'로 부인하는 것을 넘어 아예 '모른다'로 일관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며, 알아도 이름 정도만을 들었다는 식의 잘 짜여진 모르쇠 각본대로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앞서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탄핵심판 답변서에서 국회가 제시한 13가지 탄핵 사유를 모두 부인했다.
관련 당사자들의 '아니다', '모른다'는 말과 행동은 국민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국민의 뜻을 잘 읽겠다는 박영수 특검팀은 '아니다', '모른다'로 버티고 있는 뻔뻔한 관련자들 앞에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을 들이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