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광장에는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온라인 넘어 '밖으로 나왔다'는 성과와 '집회의 매뉴얼화'라는 한계 공존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5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가 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헌정을 유린한 국정농단 사태로 기록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에 많은 흔적을 남겼고,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중에서도 현재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한 시민들이 광장에 나와 그간의 적폐를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라고 주장한 것은, 2016년을 기억하게 할 만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어떤 날은 하루에 230만이나 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 만큼 광장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자연히 "집회에 나온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이번 집회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은 또 있었다. 집회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차별과 편견에 맞서고자 했던 '페미니스트'들이 그 주인공이다. 잘못을 저지른 정부에 분노하고 대통령은 퇴진 등의 방법으로 벌어진 일들을 수습하고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그 못지않게 집회 과정에서의 발언과 요구들 역시 '정치적으로 올바라야 한다'고 강조한 이들이다.


20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층 삼익홀에서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공동 주최한 학술포럼 '2016 올해의 단어, 또 페미니즘 : 여성혐오의 역사, 이론, 현실'이 열렸다. 이날 포럼에서도 '광장으로 나온 페미니즘'의 의미를 짚는 발표가 있었다.

◇ "광장에 나옴으로써 정치적 역량을 인정받은 시기"

문화연구자 오혜진(성균관대 국문학 박사) 씨는 이날 포럼 2부에서 '광장의 페미니즘-페미니스트 혁명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율'을 발표했다. 그는 3·1 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87 민주항쟁 등 수많은 투쟁들이 문학 안에서 재현될 때 임장감(녹음기나 라디오로 연주를 들을 때 마치 현장에서 실제로 듣는 듯한 느낌), 즉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감각을 우선하는 것을 예로 들어, '집회에 참여했다'는 것이 혁명의 주체로 승인받기 위한 가장 핵심적 변수라고 설명했다.

오 박사는 "문학사적 재현 기율(도덕상으로 여러 사람에게 행위의 표준이 될 만한 질서)에 따르자면 광장에 나가지 않으면 전혀 발언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누가 광장에 있었느냐' 여부가 발언권 확보할 수 있는 최우선 조건이라면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이 역사에) 기입되는(적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 역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집회에 참가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밝힌 오 박사는 2016년 페미니스트들이 직접 광장으로 나온 것은 "더 이상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됐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 광장 부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앞에서 '페미니스트 시국선언'이 있었다. 이 시국선언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인권단체 34곳과 수많은 개인이 참여했다. (사진=김수정 기자)
오 박사는 온라인을 넘어 밖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페미니스트들을 '헬페미'라고 규정했다. 그는 "한 마디로 '지옥에서 온 페미'다. 자신들의 탄생조건이 '헬조선'이라는 바탕에 있고, '지옥불'에라도 들어가겠다는 심정을 반영한 말이다. 더 낮아질 임금도 없고, 더 이상 낮아질 사회적 지위가 없어 '잃을 게 없는' 이들의 급진성이 드러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소위 새 세대 페미니스트, 뉴 페미니스트, 트위터 페미니스트, 온라인 페미니스트 등으로 불리는 이들이 트위터에서만 활동하는 존재인지 현실에서 운동성을 가질 수 있는지 의심했는데, 광장에 나옴으로써 정치적 역량을 인정받은 시기였다고 생각한다"며 "여성, 성소수자, 동물권 옹호자 등 몹시 다양한 커뮤니티들이 연대해서 페미존을 만들었고 시국선언까지 했다. 그들의 시국선언은 '거리에 정치에 페미니스트들이 확실히 있었고, 앞으로도 페미니스트들의 비전을 기입하겠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오 박사는 집회 사회자나 참가자가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을 할 경우 현장에서 문제제기를 해 즉각 정정과 사과를 받아내고, '여성혐오' 가사를 들고 나온 가수가 본무대에 서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등의 사례를 들어 광장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한 한 축이 페미니스트라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헬페미'들의 행동양식이, 집회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매뉴얼을 참가자들에게 요구하는 데에 치우쳐져 있다는 점을 아쉬움으로 꼽았다. 오 박사는 "문제 발언을 지적하고 성폭력 방지를 위해 감시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와, 집회가 이렇게 프로그램되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분노와 슬픔, 모멸감 등 온갖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끓어넘쳐 이뤄지는 것이 혁명인데, 매뉴얼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접근이 과연 혁명과 양립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고 밝혔다.

오 박사는 또한 페미니스트들이 광장에 나오게 된 의미를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는 "2016년의 시위를 비폭력시위로 각인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폭력과 비폭력 진영을 나눌 때, 비폭력 평화시위를 주장하는 쪽을 패배주의적·체제순응적이라고 바라봤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쪽에 들어가더라"며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성격을 분석하지 않고, 어떤 의심도 없이 (이들을) '정치적 올바름'을 벗어나지 못하는 세력으로만 간소화하는데 이는 매우 폭력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