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조혜진 앵커
■ 대담 : 김명수 목사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
◇ 조혜진 > 지난 해 드러난 국정원 간첩 조작사건 기억하실 겁니다. 그 실체를 파헤친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돼 우리사회에 '간첩 조작'이 얼마나 많은지를 일깨우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1970년대 유신 권력에 의해서 간첩으로 몰려 실형을 살았던 목회자 3명이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오늘은 그 분들 가운데 한 분이세요, 김명수 목사님을 모시고 국가폭력의 실상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목사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 김명수 > 안녕하세요?
◇ 조혜진 > 먼저 재심을 통해서 무죄가 선고되셨는데 소감 한 말씀 듣고 가겠습니다.
◆ 김명수 > 중앙정보부라는 국가권력기관에 의해서 ‘조작된 간첩’으로 1심에선 무기형 받고, 2심에선 10년 받고, 4년 3개월 동안 감옥을 살다가 석방이 됐습니다. 얼마나 제 삶이 파괴되고, 또 내면화된 간첩이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 한국사회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마음속에 큰 짐이 됐는가. 비로소 ‘내가 이제 간첩이 아니구나, 무죄를 선고 받았구나’ 자유와 해방감 이런 것들을 저는 느끼게 되었습니다.
◇ 조혜진 > 목사님, 늦었지만 저도 축하드립니다. 목사님, 간첩 누명을 쓴 사건이 1975년 12월 22일에 발표된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이죠? 그 당시 한신대에서 목사님 포함해서 4명이 붙잡히셨다고 했는데 어떤 사건이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 김명수 > 75년도 10월 달에 저는 한신대학교 대학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루는 우리 학장인 김종준 박사께서 불렀어요. 자네는 지금 대학원 원우회장이니까 재일동포학생이 왔는데 그를 좀 한국말을 잘 가르쳐 주고 잘 보살펴 주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같이 기숙사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분하고 같이 대화도 많이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아침 새벽에 네 명의 건장한 사람들에 의해서 팬티 바람으로 끌려 나갔어요. 집에서 새벽에.
◇ 조혜진 > 아무런 얘기도 안 해주고?
◆ 김명수 > 네, 아무런 얘기도 안 하고. 그리고 이제 검은 세단을 타고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갔는데 한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어디에 서더라고요. 주변을 보니까 남산이에요. ‘내가 남산의 대공수사국에 와있구나’ 직감적으로 깨닫게 됐죠.
하루 지났는데 알겠어요. “네가 가까이 지냈던 김철현이 북한에서 파송된 간첩으로, 너는 김철현 간첩에 의해서 포섭된 간첩이고. 너를 통해서 한신대에 일어났던 모든 유신철폐 민주화 인권 학생 운동, 1년 반 동안의 그 모든 운동이 네가 간첩으로서 유신철폐 민주화 학생 운동을 조정 했다” 이렇게 사건을 조작을 했습니다.
◇ 조혜진 > 그렇게 사건을 조작을 하려면요. 목사님한테 엄청난 가혹행위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 김명수 > 처음에 제가 들어갔을 때 남산 그 지하실, 고문실이었고요.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무조건 “너 평양 갔다 왔지?” 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며 저는 “갔다 온 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김철현은 갔다 왔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저를 강압하고, 심지어는 제가 인천에서 간첩선을 타고 황해도를 가는 로드맵까지 정보부에서 만들어 줬습니다.
“이걸 시인해라. 그러면 네가 곧 석방돼서 나갈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이걸 저한테 강화시키기 위해서 온갖 고문과 압박과 회유, 그래도 이걸 제가 하면 죽을 것 같으니까 끝까지 거부를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정보부 지하실에서 제가 취조와 고문을 받고, 그 때의 삶이라는 것은 완전히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이 파손된 그런 삶이었고, 반정부 학생 운동 전체를 북괴의 조정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유신정권을 유지시켜나가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김기춘 씨가 그것을 만들었고, 조작을 해서. 나중에 그것이 이제 ‘재일동포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실제 내용이었습니다.
◇ 조혜진 > 아니, 얼마나 억울하시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감옥에서 4년 3개월 계시다가 나오신 다음에는 어떻게 사셨어요, 지금까지는?
◆ 김명수 >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이제 한신대학 대학원에 복학을 했어요. 끝나고 한신대 교수로 있던 안? 선생님 운영하는 한국신학연구소 거기에 제가 책임자로 들어가서 거기서 모든 것을 관리를 했습니다.
은퇴를 한 후에는 지금 충주에 있는 조그마한 ‘예함의집’이라는 노인 요양원이 있습니다. 치매 어르신들 30분을 모시고 그 분들을 섬기는 그런 삶을 살고, 부분적으로 강의가 오면 나가서 재능을 기부하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조혜진 > 네, 다른 동료 분들은 소식 들으셨을 때 회복이 안 된 분이 많이 계시죠?
◆ 김명수 > 특히 이제 제 위에 들어왔던 재일동포 학생은 그 때 이 중앙정보부에서 당한 모든 고문, 또는 이런 정신적인 약물 중독을 시켰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완전히 정상인으로서 생활할 수 없는 폐인으로서 가정에서 두문불출하는 삶을 40년 동안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갔을 때 만나주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김명수 네가 중앙정보부 프락치 아니었느냐? 그래서 고의적으로 자기한테 접근해서 자기를 간첩을 뒤집어 씌워서 간첩을 만들었다.” 그 친구는 사형 선고를 받았었어요, 그 당시에.
◇ 조혜진 > 40년 만에 바로 잡으신 거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와 요즘은 참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난해에 국정원에 의한 간첩조작 사건이 일어났단 말이죠? 이걸 보면서 좀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 김명수 > 저는 정말 놀랐어요. 간첩 사건 보면서 41년 전 제 사건이 어떻게 보면 최초의 김기춘에 의한 간첩조작 사건이었거든요. ‘40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그 사건이 반복돼서 조작된 사건이 나타났구나’ 이를 보고 저는 상당히 놀랐고, 인류역사라는 건 한국 역사가 잘못된 역사를 청산(해야)하고, 그냥 이어갈 때에는 현재 반드시 반복된다는 것.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이것은 만고의 어떤 하나의 역사적인 진리가 아닌가. ‘우리 역사가 그걸 배워야 되고,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 조혜진 >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는 말씀이 굉장히 이렇게 뼈있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국가 폭력에 의한 억울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목사님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시겠지만 우리 모두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잘 감시를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명수 목사님,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