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수필 문학의 백미인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홍천기. 그녀는 도화서의 종8품 관직을 얻은 화사(畵史)였으며, 절세 미녀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유일의 여성 화사 홍천기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 작가의 상상력을 만나 역사적 사실 위에서 한 편의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했다. 작가는 정사를 씨줄로 삼고 야담을 날줄로 삼아 한 편의 새로운 수묵화를 그려 낸 후에 홍천기라는 색을 덧입혀 작가 자신만의 독보적인 그림을 그려 냈다.
동짓날 세화(歲畵)를 찾으러 오는 의문의 흑객, 행방을 알 수 없는 태종의 어진……. 이 모든 사건을 추적하는 서운관 하람과 풍류남아 안평대군. 그 열쇠는 홍천기에게 있다.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한 새로운 여인 홍천기! 홍천기의 종횡무진 천방지축의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은궐 지음 | 파란 | 1권 568쪽, 2권 560쪽 | 각 권 14,000원
지하철에서 성추행하는 남자를 현행범으로 붙잡아 신고하고, 회색빛 근엄한 법원에 초미니에 스틸레토힐을 신고 출근하는 젊은 여자 판사, 박차오름. 그녀를 주시하는 눈들은 그녀의 일상을 몰래 촬영해 SNS에 동영상과 사진을 올리기에 이른다. 거기에 따라붙는 해시태그는 ‘#튀는_판사’, ‘#남혐_판사’ 등 각종 ‘여혐’ 언어들. 급기야 그녀는 SNS상에서 ‘미스 함무라비’로 불리기 시작한다.
“어디 보자. 잊힐 권리의 침해? 재미있는 사건이네요. 에휴, 저야말로 요즘 제발 좀 잊히고 싶다고요. 이상한 별명까지 붙어서 제 온갖 동영상과 사진이 떠돌고 있는 거 아세요? 미스 함무라비라니, 하필 내가 싫어하는 성차별적 호칭 ‘미스’까지. 근데 원고가 누군데 이런 최신 트렌드의 사건을 제기한 거죠?” _본문에서
젊은 여성 판사의 거침없는 정의로움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그녀가 속한 재판부를 궁지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법조계는 그녀를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감정적”이라고 평가하며 예의주시한다. 과연 박차오름은 이런 세간의 평가와 편견들을 뚫고 진실을 향해 굳건하게 나아가는 판사로서 우뚝 설 수 있을까.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388쪽 |13,500원
「불안과 열망」의 ‘수경’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이상한 여자’로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돌연 결혼을 미루고 그의 약혼자가 신혼여행지로 가고 싶어했던 브리즈번으로 혼자 떠나온 수경은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자신의 직업을 거짓으로 꾸며 말하기도 한다. 신상은 거짓으로 꾸며냈지만 실은 이 모든 순간이 수경에게는 ‘진심’이다. 그저 진심으로 스스로에게 솔직해졌을 뿐이지만, 약혼자는 수경이 왜 이런 돌발행동을 하는지 어쩌면 끝내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수경은 이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균형을 잡는 일을 잠시 놓았을 뿐이다.
「이상한 정열」은, ‘무헌’을 사로잡은 ‘이상한 정열’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열기에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는지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작품이다. 무헌은 서른에 만나 7개월을 사귀고 헤어졌던 여자 ‘말희’와 근 20년 만에 재회한다. 중년이 되어버린 무헌은 말희를 향한 때늦은 정열에 사로잡히는데, 그는 자신의 인생이 텅 빈 채로 무엇인가를 그냥 건너뛰어버렸다고 느낀다. 균형 잡는 일에 실패한 무헌, 그래서 더없이 ‘이상’해 보이는 그는 이제 자기 생의 빈 곳을 채울 수 있을까.
「4번 게이트」의 ‘나’는 의붓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내 엄마가 편지 한장을 남겨놓고 집을 나가자 친오빠가 아닌 ‘오빠’와 단둘이 남게 된다. 오빠는 “멍청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구석”(68면)을 가진 스물여덟 남자인데 ‘나’는 그런 오빠에게 이상한 다정함을 느낀다. ‘나’는 “내 삶의 가장자리에 깃든 가장 미더운 어둠”(79면)이 바로 오빠라고 말한다. 소설 말미, 누군가 그려준 두사람의 그림에 대한 묘사를 읽다보면 마치 그들이 쌍둥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친남매도 아닌 그들에게서 애틋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어둠과 슬픔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리라.
기준영 지음 | 창비 | 240쪽 | 12,000원
남해안의 낙도에 불과했던 풍도(風島)의 특이한 장례법이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다큐에 방영되면서 섬의 초분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인기 코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때 멸치파시로 번성했던 풍도는 예전의 명성과 영광을 되찾기 위해 온 주민이 나서서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바로 ‘영어’와 ‘SNS’.
그런데 풍도를 부흥시켜준 SNS로 인해 섬은 큰 위기에 직면한다. 풍도의 한 어부가 중앙일간지에 섬의 과거사에 대해 제보를 한 것이다. 오십 년대부터 팔십 년대까지 풍도의 멸치파시와 어장을 이끌었던 마을의 지도자 행대감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였다. 그가 풍도 외곽인 잘포리에 사는 한센인들이 섬을 떠나지 않는다고 죽창과 낫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그 사건을 치부로 여겨 외부에 알리지 않고 감추는 동시에, 그 일을 주도했던 당사자를 행대감이라는 호칭을 써서 추앙하고 섬을 부흥시킨 영웅으로 숭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군청의 지원을 받아 멸치파시 기념관을 지으려는 행위가 사실은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행대감을 기리는 사업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생존본능이 야기한 광기의 현장을 지켜보며 이 섬을 움직이는 힘에 의문이 든 ‘나’는 점점 그 정체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데…… 과연 바람의 섬, 풍도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풍도라는 작은 공간에 한국 사회에 떠도는 여러 문제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압축해냈다는 점에서, <올빼미 무덤>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풍자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
강희진 지음 | 은행나무 | 268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