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태어나 바이올리니스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한 박지혜는 어린 시절부터 독일 총연방 청소년 콩쿠르를 비롯해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갖고 태어난 것은 음악적 재능이 아닌 ‘노력하는 재능’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게는 하루에 열여섯 시간까지 연습에 매달릴 정도로 지독하게 자신을 다그친 연습벌레이기도 했던 그녀는 울프 횔셔, 제이미 라레도, 고토 미도리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사사하고 그들에게서 극찬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로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을 자신이 이루어야 할 목표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늘 자신이 모자라고, 부족하고, 가야 할 길이 멀다고만 생각했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과정이 가져다준 것은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이 아닌 나락을 알 수 없는 극심한 우울증이었다. 최고의 명기 과르니에리를 앞에 두고도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어 눈물만 뚝뚝 흘려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의사는 그녀가 언제 급사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간의 뼈아픈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자책과 절망 속에 그녀는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 작은 한 줄기 위로와 희망이 되어준 노래들,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저 음악 그 자체만으로 위안을 주었던 곡들을 모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음반에 담긴 곡들이 고통에 빠진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유작 앨범으로 생각한 '홀리 로드(Holy Lord)'를 발매한 박지혜는 이후 보통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서지 않는 무대도 가리지 않았다. 병원, 감옥, 교회,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을 위한 격리시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음악적 치유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그 무대는 끝없는 경쟁으로 평가받고 혹독한 연습으로 상처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음악이 주는 위안과 치유, 그것을 온전히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이 누군가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작은 희망의 불씨나마 전해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 오로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은 그녀의 마음에 ‘이타심’이 대시 자리했다(박지혜는 그것을 “선한 영향력”이라고 표현한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로 마음먹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타인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연주했던 음악이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마음을 위로한 것이다. 도저히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우울증에서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연습하고 또 연습해도 낼 수 없었던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고, 연주할 때마다 늘 2퍼센트 부족한 것 같았던 곡들도 흡족할 만한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박지혜가 정통 클래식 연주자로서의 틀을 깨고 민요, 동요, 가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전천후 연주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의 삶을 타인을 위한 치유의 통로로 만들어보세요. 그럼 당신의 삶이 변화할 것입니다.”
희망이 없고, 미래를 꿈꿀 수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해도 버텨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요즘, 그녀의 메시지가 얼핏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늘 내게 주어진 삶과 일을 단지 나 자신만이 아닌 남을 위할 수 있는 통로로 만들어보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를 만나고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변화들이 모여 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한다. 절망과 좌절과 상실의 시대, 그녀는 자신의 연주와 메시지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위로와 열정을 되살려주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박지혜 지음 | 시공사 | 212쪽 |13,000원
그가 이번 책에서 들고 나온 화두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거리다. 나와 나 자신, 나와 당신, 그리고 나와 공동체, 대한민국이라는 이 애증 어린 나라 사이의 최적의 거리에 대한 치열한 고민. 이 책의 1부에서는 그는 일상에서 벌어진 실패의 연대기가, 2부에서는 그가 사랑받고 싶었고, 열렬히 사랑했던 ‘얼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3부 ‘끓는점’에 이르러 지금, 우리들에 초점을 맞추어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아픔과 분노를 담은 이야기를 보여준다.
책 속으로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투사였다.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광장의 음악이었다.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젊은 시절의 섬광이었다.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논객이었으며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늦은 밤 이어폰을 통해 울려퍼지던 굵고 낮은 목소리였다. 신해철은 어쩌면 그 모든 것과 무관한 무엇이었다. 그는 그저 마음 약하고 대책 없이 따뜻하며 아이들을 거짓말처럼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내게 그는 좋은 친구였다. 나도 그에게 좋은 친구였기를 바란다. 형이 보고 싶다. 우리 형이 너무 보고 싶다. _ 「신해철에 관하여」 172쪽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324쪽 | 15,000원
책 속으로
일기를 쓰는 건 자신의 마음이 가고 있는 지도를 스스로 그려 가는 일이다.
지난 한 달간 나는 生에서 人間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아직 생의 종착역까지는 많이 남았다. 내 열차가 너무 많은 승객들로 대화조차 불가능한 것은 곤란하지만, 아무 승객도 없이 그저 운행 일정을 지키기 위해 달리는 열차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종착역은 같지 않더라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한 명의 승객이 있었으면 좋겠다.
젠장, 이곳도 가을이다.―162쪽
백림에 와서 무얼 했나 뒤돌아 보니, 일기만 쓴 것 같다. 대충 살자고 해 놓고, 일기를 너무 열심히 쓴 것이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누가 ‘아이고. 최 작가님 고생하십니다’ 하며 계좌 이체를 해 주는 것도 아니고, 국가에서 ‘최 작가. 적성에도 안 맞는 군 복무 하느라 힘들었네. 다음 생에 한국에서 또 태어나면 면제로 해 주지’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열심히 쓴 것 같다.―262쪽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496쪽 | 1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