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재단 의혹부터 탄핵안 표결까지…'대하드라마'

'최순실 태블릿PC 공개'‧'230만 명의 촛불집회', 탄핵 변곡점으로 꼽혀

(사진=청와대 제공)
역사는 2016년을 어떻게 기록할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3차 대국민 담화에서 "대통령직에서 물러 나겠다"고 밝혔다. 지난 7월 미르재단 의혹이 처음 언론에 보도된지 4개월만이자, 촛불집회에 1987년 6월항쟁(3백만~5백만 참여)을 훌쩍 넘는 연인원(주최 측 추산 641만 명)이 참여하는 진기록을 세운 지난 3일 6차 촛불집회(230만명)가 끝난 지 닷새만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불법 모금 의혹이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로 전환되고, 헌정 사상 두번째 대통령 탄핵안 발의까지 이어지기까지는 변곡점이 됐던 결정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사진=자료사진)
◇ 연이은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與의 국감 거부와 여론에 떠밀린 백기투항→野의 난타전


TV조선은 지난 7월 26일 미르재단이 설립 두 달 만에 대기업에서 5백억 원 가까운 기금을 마련했고 이 과정에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8월 2일에는 전경련이 K스포츠재단의 설립 과정에서 380억 원이 넘는 금액을 모금했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이사진과 모금액이 똑같다며 두 재단의 배후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후 한겨레신문이 9월 20일 K스포츠재단 이사장이 최순실씨의 단골 마사지 센터장이라는 보도를 하며 언론의 '최순실 파헤치기'에 막이 올랐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3당은 20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예고했다. 하지만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를 문제 삼으며 국정감사를 거부하는 새누리당의 반발로 국감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미르·K스포츠재단 진상규명을 막기 위해 새누리당이 국감을 거부했다는 여론이 커지자 새누리당은 사실상 '백기'를 들고 국감에 복귀했다.

이후 야당과 언론보도를 통해 미르·K스포츠재단 기금모금은 물론 각종 국정운영에 최씨가 개입했다는 정황증거들이 쏟아졌고, 최씨의 딸 정유라씨가 고교 시절 출석부터 이화여대 입학과 출결, 평가까지 '전천후 특혜'를 입었다는 의혹이 쏟아지면서 들끓는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하지만 정부·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이어지는 의혹들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진=자료사진)
◇ 朴, 개헌으로 물타기→최순실 태블릿PC공개→朴, 1차 대국민 담화

최순실씨의 이권 개입 및 특혜 사건이 '최순실의 국정농단 의혹사건'으로 급변한 변곡점은 10월 24일로 꼽힌다. 이날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 연설을 통해 '개헌 카드'를 꺼내들며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물타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같은 날 JTBC는 최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최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미리 받아봤다고 보도하며 국면이 완전히 전환된다. 최씨가 단순히 이권을 챙긴 것이 아니라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제시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보도 다음날인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통해 "최씨가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께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면서도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 뒀다"고 밝혔다.

하지만 1차 담화 직후 최씨가 연설문뿐만 아니라 고위 공직자의 인사나 통일‧외교 정책 등 국가의 중대사와 관련된 자료를 받아보며 비선 모임을 통해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폭로가 쏟아지면서, 10월 29일 2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인 1차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진상규명 대신 김병준 후보자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며 인사권을 행사했고, 야권과 여론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때부터 야권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퇴진 요구가 본격화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2차 촛불집회 전날인 11월 4일, 전격적으로 2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박 대통령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 이번 일의 책임 규명에 최대한 협조 하겠다"며 "필요하다면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할 각오이며 특검 수사까지 수용하겠다"며 승부수를 띄웠다.

달아오른 여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11월 5일 2차 집회에 모인 20만명은 입을 모아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쳤다. 이후 박 대통령은 8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전격 회동해 ‘국회에서 총리를 추천해주면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야권은 ▲특별법에 의한 특별검사 도입 ▲국정조사 수용 ▲총리후보 지명 철회 및 국회 추천 총리 수용 등 선결조건이 이행되지 않으면 대통령 퇴진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대통령과 여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11월 12일 '100만 촛불'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날 집회를 계기로 역풍을 우려하며 신중한 반응을 보이던 야권에서 탄핵 논의가 본격화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5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26일 오후 서울 청운동사무소에서 광화문광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 3차 대국민 담화→230만 촛불집회→비박, 탄핵가결로 선회

아이러니하게도 탄핵 논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었다. 박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는 16일 "대면조사는 불가능하고 서면조사를 원칙으로 해달라"며 검찰의 대면조사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검찰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것이다.

이런 박 대통령의 '마이웨이'에 야권 대선주자들은 20일 '비상시국정치회의'를 연 뒤 대통령 탄핵 추진과 국회 주도 총리 선출을 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3당에 요청했다. 이후 11월 26일 5차 촛불집회에서는 헌정 이래 최대 규모인 190만명이 모여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를 외쳤고,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29일 탄핵을 당론으로 결정하며 일찌감치 탄핵을 당론으로 채택한 정의당과 단일대오를 형성했다.

하지만 탄핵 의결정족수(200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누리당 의원 29명의 찬성이 필요한 상황. 야권은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설득에 나섰지만 비박계는 '자기당 소속 대통령 탄핵'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29일 3차 대국민 담화를 통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일임하겠다"며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이정현 대표 등 친박(친박근혜)계를 중심으로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데 탄핵까지 해야하냐'는 압박이 나왔고, 비박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흘러나왔다.

정치권은 좌고우면했지만 국민들은 단호했다. 3차 담화 직후인 지난 3일, 전국에서 232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이로서 6차례 걸쳐 열린 촛불집회에는 1987년 6월항쟁(3백만~5백만 참여)을 훌쩍 넘는 연인원(주최측 추산 641만명)이 참여하게 됐다.

들불처럼 번지는 민심에 비박계는 결국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는 쪽으로 선회했고, 새누리당 지도부 역시 탄핵안 표결 자체를 거부할 것이라는 당초 전망과 달리 탄핵안 자유투표 참여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8일 국회 본회의에서 권영진 국회사무처 의사국장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의사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오는 9일 국회는 오후 3시에 본회의를 열고 전날 보고된 박 대통령 탄핵안에 대한 표결에 들어간다. 역사는 이날을 어떻게 기록할까. 제도권 정치에 탄핵을 압박한 촛불민심이 승리하는 날일까, 아니면 대통령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국회의원들이 96%의 민의를 배신한 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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